[KNS뉴스통신=박세호 기자] 지난 8월말 휴가를 겸하여 ‘#의령 한달 여행하기’ 프로그램에 참가해 2박 3일의 여행을 즐겼다. 4월중 의병제전과 이호섭가요제 등이 있을 때 여행하면 더욱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의병제전은 영령들에 대한 추모의 뜻을 기리는 기념제이다. 동시에 의병들의 나라사랑과 그 호방한 기질을 살려 마음껏 즐거움을 나누는 축제의 성격 또한 매우 중요하다.
‘의령 홍의장군축제’는 군민들이 의기를 투합하여 힘을 합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그 전통을 꾸준히 이어왔다. 역사 인물인 의병장 곽재우는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큰 공을 새웠다. 1552년(명종 7)에 태어나 1617년(광해군 9)에 세상을 떠났다. 34세 (1585년, 선조 18) 때 과거에 합격했으나 그 글이 임금의 생각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합격이 무효가 되었다.
그는 평생 벼슬 욕심을 버리고 은거하기로 한다. 그리고 3년 만인 1592년 임진왜란으로 관군이 패배하고 국운이 위태로워지자, 은거지에서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아 나라를 지켰다. 장군은 의병장으로서 뛰어난 통솔력과 전법으로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붉은 옷을 입고 의병을 지휘하며 홍의장군이라 했다.
대담성을 과시하며 적진에 홀로 출전하거나 적을 속이고 유인하면서 유격전을 시도하는 등 적이 가장 두려워 했다. 그 공으로 형조정랑 등 고위직에 임명되고, 또 조방장(助防將)을 겸했다.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고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얼마 후 현풍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위직도 맡았고, 민간에서 의병장이 되었다가 재야의 인물이기도 했던 독특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1597년 일본의 재침에 대비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경상좌도방어사가 되어 지역의 주요한성들을 수비했다. 계모의 상을 당해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오랜 동안 여러 가지 사유로 관직에 나가지 않아, 심지어 귀양을 간 적도 있다고 한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고, 한성부좌윤에 임명되는 등 수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낙향했고 1617년 세상을 떠났다. 의병 활동 시엔 지휘 본부인 의령을 고수하며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활발히 대처했다. 의병은 2,000인의 대병력으로 경상우도를 보존하고, 왜군의 호남 진출을 저지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의병박물관에서는 곽재우장군의 일대기를 여러 가지 전시물을 통하여 잘 표현하고 있고, 그를 따르며 국가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었던 17인의 장군들에 대한 활동상 역시 시청각 자료를 이용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시작하여 우리 역사의 각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가야문화의 발자취를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이 되어있고, 이곳이 고향인 우륵의 모습도 그림으로 볼 수 있다. 의령 시외버스터미널은 아직도 구도시의 낭만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보여주고 있다. 공터와 건물 뒤의 조그만 야산의 경치가 좋고, 모텔과 여관 등 숙소들도 이곳에 줄을 지어 세워져있어 멀리 걷지 않아도 되고, 안전한 숙박이 가능하다.
터미널 입구 버스탑승장 표지판 앞에 서있으면 곧 의령군 중심가 순환버스가 도착한다. 군청 들어가는 입구에 전통시장이 있고 그 앞에 우체국이 있다. 여기가 종합버스정거장이다. 장터로 모이는 인구가 가장 큰 것이므로, 전통시장 앞의 교통편 연결이 편리하였다. 의령군과 인근 군청 소재지와 면 단위로 나가는 시외버스나 마을버스 등을 탈 수 있다.
여기 10분간 걸으면 의병교를 건너간다. 충직사와 의병박물관으로 항하게 된다. 의병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마침 의령 한지를 이용한 민화작가의 작품전시회가 있었다. 박물관을 나와서 다시 우체국 앞 정류장에서 시외버스ㅡㄹ 탔다. 나혼자 하차한 입산문화역사마을에는 일제강점기 서릿발 같은 정의감과 민족정신으로 나라의 자존심을 지켜낸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를 비롯한 유서 깊은 역사적 자취들이 보존되어 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은 양정의숙(養正義塾)을 졸업 후 교육에 힘썼다. 1907년부터 동래에 구명학교와 의령군에 의신학교와 창남학교를 세웠다.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했다. 만주와 시베리아를 돌아본 후 1914년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경영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단체와 맥을 이었다. 1919년 3·1운동 때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하고 중앙일보로 항일언론활동을 하였다. 또한, 1927년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고, 만주로 건너가 민족운동을 위해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1933년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세워 교포들의 생활 안정과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1942년 일제에 체포돼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9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병원에서 순국하였다. 고향인 의령에 생가가 있고, 부산 용두 공원에 백산기념관이 있다.
그 이전에 몇 군데를 들른 곳이 있었다. 의병제전과 이호섭가요제가 열린 곳들이었거나, 그것을 주최한 기관 등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포스터나 전단지 같은 것이찢어져 남아있는 그런 것 조차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사)의병기념사업회 사무실을 찾았더니 거기 의병제전과 이호섭가요제의 포스터를 벽면에 정성껏 부착해놓은 것을 보았다. 시원한 드링크를 여직원께서 건네주어서 더위를 달랬다. 의령의 대표적 행사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신인가수 등용문으로 유명한 이호섭가요제를 이번 기회에 잘 알게되었다.
의령에 가기 며칠 전 우연히 MBN의 공감다큐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작곡가 이호섭의 생애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인품이라든가 생활사 등 내용이 재미를 주었다. 의령에 대한 좋은 이미지와 가보고 싶은 의욕ㄱ이 생기게 한다. 그 외에도 짧은 지면에 옮길 수 없는 많은 좋은 추억을 안고 돌아왔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역사의 고장 의령 여행의 감동이 여운을 남기며 오래갈 것 같다.
박세호 기자 bc4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