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22:39 (일)
[정치인 정대철 직격인터뷰] "대통령 선거 전망하기엔 아직 일러...총선 끝나고 정치 환경 개편된 이후 예측 가능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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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정대철 직격인터뷰] "대통령 선거 전망하기엔 아직 일러...총선 끝나고 정치 환경 개편된 이후 예측 가능할 것"
  • 박세호 기자
  • 승인 2012.02.28 1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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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정대철 직격인터뷰] 질풍노도 속 앞만 보며 달려온 정치인생 ... 아직 못다피운 꽃 한 송이

 

 정대철 전 의원(5선)                      사진 ⓒ 김현수기자

"지금까지 2승1패를 했다. 한 번 더 참여해 3승 1패의 전적을 남기고 싶다. 나의 소망이다. 우선 ‘보편적 복지’ 선진사회를 이뤄야 한다. 이것은 국민적 요청이며 시대적 화두다. 다음으로 남북관계 통일정책을 ‘스마트한 포용정책’으로 이룬다."

[KNS뉴스통신=박세호기자] 나이 33세에 국회에 처녀 등단해 유래 없는 철권통치의 유신 체제를 향해 "박정희 정권 물러나라"며 비수와도 같은 경고음을 날렸던 당대 민주투사 정대철 전 의원(5선).

그에게도 세월은 여과 없이 흘러 이미 노장층 주류를 대표하는 현역 정치인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아직도 한국정치가 정대철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어떤 역할일까? 그가 다짐하는 소명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시큰한 땀냄새 풍기며 시위 현장이나 길거리에서 점퍼를 걸친 마음씨 좋은 '아저씨'로 기억하는 활동가나 유권자들도 의외로 많다. 5선 의원으로 세미나 장에서 영어 통역이나 사회도 보는 참신한 정치학자요 원칙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정당정치 계보에 익숙한 얼굴 두툼한 당료(黨僚)로 기억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한국사회 다계층의 광범위한 인맥은 이 시간 현재 그의 정치적 자산이기도 하다.

정 의원은 SNS로 성장하는 젊은 세대들과도 대화의 통로가 무한궤도로 열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 정대철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지나온 '역사'를 읽어야 한다. '인간' 정대철을 키워온 것은 그의 가계에 흐르는 '항일, 민주투쟁의 정통성'에 힘입은 바 크기 때문이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라고 읊은 어느 시인의 심정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총선과 멀리는 대선까지 바라보는 정치의 계절이 막을 열었다. 역사의 강물이 흐르는 것은 달력 동그라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이 보인다. 폭풍전야와도 같은 이 민감한 시기에 정대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과거라는 분석 프리즘을 통해 미래 구상으로 이어지는 1시간 반의 열정적인 대담 내용을 <KNS뉴스통신>이 충실히 기록해 여기에 남긴다.

      정대철 전 의원                사진 ⓒ 김현수 기자

▲어머니 이태영 변호사에 대한 추억이 남다르시리라 생각된다.
- 4남매를 기르면서 늦깎이 서울법대생이 되셨다. 이화여전 가정과 출신인데, 남편 정일형박사의 항일 독립운동으로 무진 고초를 겪었다. 정박사는 일제 하 감옥에 5회 투옥되고, 검경에 23회 체포됐다. 누군가는 민족을 위해 법을 공부해야 된다는 사명감에 진로를 정했다. 오른손이 심하게 휜 것은 남편 옥바라지 와중에도 생계를 위해 누비이불 장사를 해서이다. 가위가 잘 안 들어 고생했고 손이 뒤틀렸다.

여자가 최초로 고시 합격했으나 판사 임명은 안되었다. 그래서 변호사로 나갔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야당 국회의원 마누라를 판사 시켜줄 수가 없다고 해서 변호사가 되었고, 이 땅의 여성문제에 초석을 깔기 위해 여러 사람의 뜻과 기금을 모아 가정법률상담소를 열었다.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개혁이다. 정당개혁, 선거개혁, 권력구조개혁을 하는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분권형 대통령제나 내각제를 선호한다. 대통령 선거를 전망하기에는 지금은 빠르다. 총선 이후 정치 환경이 개편된 이후에야 다소라도 예측이 가능할 것이다. 선거는 내실이 중요하지만 임박해서는 ‘바람’의 역할이 크다."

▲ 어머님의 여성운동, 사회운동 인사들과의 일화가 있다면.

-상담소가 여성100인회 건물 안에 있었다. 조영남, 세시봉, 기타 60년대 그룹들이 당시 교도소 등에 갇혔을 때 선교활동과 교화사업으로 연결됐고 나의 대까지 내려오며 좋은 일로 협조하고 있다. 강원용 목사도 동생처럼 지내셨으며 어머니도 함께 민주화를 걱정했다. 최경록장군은 1성 장군에서 시작해 10년을 알았고 장면박사 집권 시절 참모총장도 됐다. (그러나 곧 장도영총장으로 변경) 김흥균은 총리 비서실장을 했고 김&장에서 일했으며 사위가 됐다(나의 자형이다). 천관우, 김범수, 주문기, 조규대, 조규광씨는 어머니와 서울법대에 동문수학했고 내게도 영향을 주신 분들이다.

▲ 정일형박사가 아버님으로서는 어떠하셨을까 궁금하다.
- 일제 하 투옥돼 신사참배로 순교한 주기철 목사도 한 감방에 계셨다. 해방 후엔 이승만, 박정희의 독재정권 탄압에 항거했다. 4.19혁명 후 8개월간 수석 국무위원으로 외무부장관도 했다. 친척도 꺼리는 요주의인물이라 생계는 말이 아니었다. 감신대학 교수를 7년간 했다. 대부분 서대문형무소와 서대문경찰서에서 보냈지만 신앙적으로 활동하신 업적도 크다. 감신대에서 올해 4월 23일 30주기 때 정일형, 이태영 세미나를 한다고 해 감사할 뿐이다.

내가 임종을 지켰고 아버님을 내 품에 안고 보내드렸다. 유언은 세 가지였다. 첫째 민족주의를 위해서 일하라. 둘째 교회를 위해서 일하라. 셋째 통일을 위해서 일하라는 것이었다. 최후의 힘으로 일어나 서시더니 선언하듯 말하시고 주저앉아 숨을 거두셨다. 제게는 아버님이자 스승이다. 부친의 풍모가 어떠했냐하면 카메라 도난 사건이 있었다. 연희전문 시절 선교사 집에 거처하며 일을 도왔는데 카메라가 없어졌다. 교회 친구 (이분도 유명하신 분)가 먼 후일 자기 소행을 고백했다. 친구를 대지 않고 누명을 썼다. 포용력이 많은 분이다.

국회의원 해보니까 연속 8선 의원 하신 것이 대단한 일이란 것을 절감했다. 나는 5선이지만 중간에 떨어지기도 했다. 많은 의원들이 지역구를 바꿔 출마한다. 정일형 의원은 한 지역구를 고수하면서 쉬지 않고 8선이다. 지역구민의 사랑과 신뢰에 눈물이 난다.

▲ 부친과 교류하시던 분들이 역사에 남으신 분도 많으시겠다.
- 춘원이광수처럼 안타까운 얘기도 있다. 10세 위로 형님처럼 모셨던 춘원(春園)에게 '독립이 멀지 않았다'고 했을 때 춘원은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우선 목숨을 아낍시다'라고 사랑하는 후배를 위해 일제와의 타협을 간곡히 권했다. 해방이 되자 춘원이 자신의 생각이 모자랐다고 큰 절 받으라 해 극구 사양했는데, 하루는 돗자리를 지참하고 찾아왔다. 부친께서는 춘원에 대해 도리어 그의 큰 도량을 흠모하신다고 했다.

유석(維石) 조병옥 박사와의 에피소드다. 6.25때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방송을 내보내고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한강을 넘어 피난을 갔다. 수원에서 유석을 만나 이를 지적하자 "나는 서울로 가서 피란하란 말씀을 시민들에게 할 작정이요"하고 사지로 떠났다. 유석은 생환했으나 동반했던 일가 측근이 희생됐다. 부친은 '국가가 어려울 때면 유석이 생각난다'고 했다.

부친은 ‘대한통신’을 애착을 가지고 키웠다. 이병철씨, 김성곤씨 등이 이사로 있었다. 이병철씨는 통신사의 동경특파원 자격으로 자신의 사업을 크게 키웠다. 대한통신이 정치적으로 탈취되어 김성곤씨에게 동양통신 경영권이 갔다가, 후일 연합뉴스로 통합된다. 중앙신학교(현재의 강남 대학)를 설립했으나 현재는 설립자 지위는 빼앗기고 초대이사장으로만 남았다. 내가 문화공보위원회를 맡고 있을 땐데, 그 학교 근처엔 얼씬거리지도 말라 하셨다. 어머니가 설립한 가정법률상담소는 여성계의 자랑스런 유산으로 후일 이화여대로 넘겼다. 정일형의원은 한일굴욕회담을 반대하는 윤보선, 정일형, 서민호, 김도연, 정셩태, 김재광, 윤제술, 정해영 등 의원직 사퇴 8의원에 가담한 이후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정대철 전 의원(5선) 사진 김현수기자
 

 ▲ 맨 처음 국회의원 출마는 부모님의 권유였나.
- 부모님은 ‘쌍수로‘ 반대했다. '저들이 너만은 당선 안 시킨다. 그것은 아버지의 3.1명동구국선언을 합리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독한 유신체제 하에선 정치를 않는 것이 좋다.'

그래서 내 의견을 개진했다. '그렇게 못할 겁니다. 그들의 묘혈을 파는 일이기 때문이죠. 위기가 기회입니다. 국회의원 되면 의원직 걸고 정치하겠습니다.' 이런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령탑인 이철승 의원은 평지풍파를 일으킬 공천을 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명분상’ 안 해줄 수도 없었다. 내 선거구는 무 공천 지역으로 남았다. 종로, 중구 연합 지구 보궐선거에 두 명의 국회의원을 뽑는데 오제도, 정대철이 당선됐다.

▲ 3김 시대 때 누가 더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나.
- 김대중, 김영삼 모두 출중한 분들이었다. 두 분은 능력과 인간미 이런 면에서 정반대 순위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정치적으론 선대부터 평행선을 갔지만 김종필씨도 인간적인 교감이 있다. 지난번 H호텔 로비에서 해후했다.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다. ‘정대철 의원!’ 하면서 손을 잡고는 로비에서 호텔 종업원에게 양주 3병, 맥주 2병을 시켜 폭탄주를 만들었다. 건강 상 권하면 안 될 것 같아 내가 다 받았다. 나를 대우해주며 인생의 어느한 부분을 멋지게 표현하려는 것 같아서 감동적이었다.

회고하건데 역사적인 순간 DJ와 JP가 협조를 타진했었다. 이회창과 JP가 손잡으면 그들의 배부른 선택이다. JP와 이회창이 대결하면 우리에게 승산이 있다. DJ와 이회창이 대결이면 근소한 차이로 불리하다. 여기에서 돌연 ‘이인제 500만표’가 나온다. 우연히 하늘이 낸 상식을 초월한 결과였다. 만약 양김이 1988년 단일화했으면 노태우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양김이 민주화를 위해 어느 일방에게 양보했더라면 멋진 결과가 될 뻔 했다. 정일형의원이 대선에서 선대본부장으로 고군분투한 후 아들 정대철이 민주진영의 대선 선대본부장이 됐다. 부자간 나름 어떤 의미가 있을까?

-YS의 추억-

YH사건으로 YS가 밤새 농성 중 폭력대가 들이닥쳐 발길로 밟고 부서지는 아수라장에서 나는 YS 위로 몸을 던져 그를 덮쳤다. 몽둥이가 타작을 하며 허공을 갈랐다. 참담한 비극으로 끝났지만 YH는 민주화 운동의 분수령이 된다. 시간이 흘러 ‘서울의 봄’이지만, 신군부만 득세했다. 상도동 팀들과 YS자택에서 담론 중, YS가 '집에 잡으러 왔단다. 도망해라' 하면서 차비를 주라 했다. 최형우 선배가 쥐어주는데 떠나보내는 그들의 ‘눈빛’하며 꺼내보니 한참은 그냥 먹고 지낼 거금이라 눈물이 핑 돌았다. 뒷담으로 밀짚모자를 쓰고 떠났다. 잡히면 검경과 기관, 군보안부대 등에서 별 수모를 다 당하던 시기였다.

잠실 주공(장미아파트 근처) 사촌 댁에 잠입 체류 중, 무료해 살짝 포장마차로 나왔다. 어라, 하필이면 옆 포장마차에 중부경찰서장과 정보과장이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혼이 빠져있었다. 둘은 서로의 눈치를 본다. 식은땀이 났다. 이윽고 그림자 둘이 내 뒤를 스치며 “오늘 안 본 것으로 합니다”라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더 후일 을지로 카페에서 YS가 “형우와 동영이에게 잘 들어봐라”하면서 호감을 표했다. 얘기인 즉, 집권은 시간문제라며, 국무총리를 시사함과 동시 상도동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왔다갔다 하는 것은 멋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한길로 가겠습니다'라고 완곡하게 답했다. 그 고난의 시기에 따뜻한 YS의 인간미는 주위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웠고 내게도 좋은 추억들을 안겨주었다.

-DJ의 추억-

역사의 계기를 창출하는 고비마다 많은 정치인들이 비상한 조직력을 발휘하는 DJ와 함께 활동의 끈을 이어갔다. 선대로부터의 인연과 함께 나도 민주화운동에 많은 시간을 공유했다. DJ와는 3당 통합 후 ‘정발연’, ‘스몰 민주당’과의 통합문제에 의견이 엇갈렸다. 사실 당세로서는 너무 차이가 났지만 통합하지 않으면 길이 없었다. 정당사회 내에서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많은 소장파(후일 모두 유명인사들로 성장함)들이 양 진영에 모두 포함된 건이라 그 당시로서는 꽤 이슈가 되었던 문제이다.

‘탈당하고 정계은퇴한다’ 하면서 원내 대표로서 소신을 걸고 담판을 했는데 DJ가 불렀다. 특이하게도 그의 목동 친척집으로였다. 나는 국회의원 한두 번 더 하는 것은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배수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DJ는 평소에 술을 잘 못하는 분이다. 그런데 양주병을 올려놓고 한 잔을 크게 따르는 것이었다. 어(?) 이럴 때는 이일이 보통이 아닌 것이다. 드디어 DJ는 합당한다는 큰 결심을 내게 주었다.)

대통령 임기를 마칠 때쯤 DJ로부터 식사 초대가 있었다. DJ가 목동에서 한 것과 같이 양주 한 잔을 크게 따랐다. 어,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가? 의아하였는데 ‘정대철 의원, 미안하다’는 취지로 말했다. 챙겨주지 못한 여러 가지를 뭉뚱그려서 이 한 마디로 말씀하시는 듯 했다. 인사문제를 비롯해 대선 후보 경선에도 못나간 사연 등 표면적인 사항도 있겠지만 여기 다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장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 다 알고 있구나' 그런 훈훈한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DJ와 함께 하던 시절                 사진 출처 ⓒ 정대철 블로그

▲ 민주화 활동과 의정활동을 함께 하며 특히 생각나시는 분이 있다면.
- 조윤형 전 국회부의장이 많이 생각난다. 조 부의장은 민한당 대표로 선이 굵은 정치인이었다. 이른바 ‘사쿠라’ 논쟁에 개의치 않고 작은 데는 협조하지만 큰 선을 긋는 데에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자기희생을 해 관철시키려는 분이었다. (예를 들면 조연하, 조윤형, 김상현 제씨가 유신 때 민주주의 원칙과 소신에 따라 보인 훌륭한 태도를 주목하게 된다. 탄압과 고초를 겪었다.) 편집자 주: 6선인 조윤형전 의원(1932-1996)은 조병옥 박사의 아들이고 조순형의원의 형이다.

▲ 법학에서 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꾼 이유가 무엇이고 결과는 어떠했는지.
- 법대에 입학하자 전국 6.3세대 운동권으로 데모만 했는데, 가령 문리대 쪽에서는 김중태, 김도현 외 여러분이 활동했다. 나는 법대에서 4번 무기정학당하고 고시는 3수에 들어간 데다 4-5년 폐병을 앓아 고시 포기하고 1년 늦게 졸업했다.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했다가 미국가서 국제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국제정치학’ 자체 뿐 아니라 법과 정치의 관계 등 사회전반을 폭넓게 보는 시야를 가지고 많은 강좌를 듣고 다양한 공부를 해서 후일 사회활동에 활력소를 든든하게 해주었다.

조순승 교수가 나의 동서이자 학문과 ‘정치학’의 선생이다. 그래봐야 진짜 정치는 정대철이 단연 위지만... 말이다. 빨랫감을 받아 부부가 직접 세탁소를 경영하다가 실패하고 고생도 했으나 내가 그 어려운 미국무성 통역요원으로 뽑혀 상당한 수입으로 생활이 안정됐다. 수퍼에서 개 그림이 붙은 통조림을 보고 너무 기뻤다. 여러 개 사서 주변에도 돌렸다. 개표 고기인줄 알고 김치찌개도 끓였다. 알고보니 개를 위한 사료라고 하여 웃을 힘도 없었다.

▲ 정치발전 면에서 세대가 통합되어야하지 않을까.
- 그렇게 생각한다. 정치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야만 정권의 창출도 가능하다. 노장청이 함께 나아가야 한다. 한국사회는 급속한 진전으로 곧 고령화시대를 맞는다. 7% 이상이면 노령화사회인데 2012년에 10%를 넘는다. 2020년에는 14.4%가 예상되어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2026년에는 20%로 곧 초고령사회가 된다고 예고됐다.

정당 정책이나 후보에서 장년층과 노인들이 원하는 정책들이 골고루 포함되어야 구성율이 맞는다. S Thurmand 상원위원은 99세까지 했다. 만약 노인층(보수층) 지지를 못 받으면 그들을 제대로 대변할 수가 없지 않은가? 특히 우리 민주통합당은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 북구식 복지 모델을 제시하신 바가 있다. 복지문제에 관한 정책방향은.
- 자본주의는 경제 법률적 개념이다. 작은 정부가 간섭을 안하고 시장에 맡긴다. 소유권을 보장하고, 계약자유 원칙을 고수한다. 결국 부익부 빈익빈이 강화되므로 바이마르 헌법체제가 구상됐다. 수정자본주의로 복지국가를 세우고 전가구가 복지혜택을 받는다. 국가가 균형 있게 하고 고소득층의 절대적 소유를 지양해야 한다. 복지선진사회는 물질 풍요와 인간 존중이 합쳐져 빈곤 해결과 성장개발을 동시 검토함으로써 인간다운생활을 추구한다. 그를 위해서 지속가능한 성장의 반석을 기초로 해야 한다.

▲ 집권 시 한미 FTA를 원점에서 재검토한다는 등 다양한 의견이 분포하고 있다.
-한미FTA는 그동안 재협상을 할 것인지 무조건 반대(혹은 폐기)를 할 것인지 선택의 문제가 있어왔다. 일부 ISD조항은 고쳐져야 한다. FTA는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가 기본적으로 좀 불리하게 맺어질 요소도 있다. 그러나 무역의존국인 한국은 교역으로 경제를 성장시키고, FTA를 살려 무역장벽을 제거하는 협정으로 활용해야 할 측면도 있다. 장점은 수출이 확대되고, 가격 경쟁력이 증가된다. (자동차, 섬유 등 부문에 해당함). 소비자는 낮은 가격에 물품 구매를 한다. 외국인 투자, 고용이 증가한다. 개방으로 국제 경쟁력이 제고되며 제도가 선진화된다.

단점이 많다. 첫째 농업과 서비스업 등 경쟁력이 약한 부문들이다. 둘째 의료 민영화되면 저소득층의 건강과 안전이 우려된다. 세 번째 해당산업의 불황과 더불어 대규모 실업자 증가가 불가피하다. 네 번째로는, 투자가 국가소송제기(ISD)로 인한 피해와 정책불안정이 우려 된다. (물론, 우리가 소송할 건이 더 많을 수도 있다). 노무현 정권이 시작한 것이라 전면적으로 너무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은 자가당착이 될 수도 있다.

▲ 대학등록금 반값 인하 문제
- 대학들이 국가 지원으로 움직이고 있는 현실이다. 등록금에 대한 의존도가 아주 높다. 등록금 인하가 주요 사립대에서 1차 시행되었다. 금년엔 더 진전된 방안이 모색돼야 할 것이다.
▲ 감세 및 증세 정책“
- 부유층이 합당한 만큼의 세금을 조금 더 내게 한다. 일반 국민들도 필요 시 조금 더 낼 수 있게 한다.
▲ 부동산과 주거문제:
- 살아갈 주택의 절대량이 부족한 형편이다. 투기화 하지 않도록(잘 조종된 정책이 필요하다) 하면서 공급량을 늘려야한다.
▲ 대통령제를 변경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 내각제 혹은 권력 분산형 대통령제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선거제도에는 중대선거구제나 비례대표제(독일, 일본 식)가 무난하다.
▲미국 일본 중국과의 외교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어떤 의견이 있으신지.
- 미국일변도(친미일변도)보다는 중국, 일본(특히 중국)과의 폭넓고 전략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급할 때 연락해도 전화 받지 않는 정도의 한중관계라면 위험하다.

 

    정대철 전 의원(5선)       사진ⓒ 김현수 기자

▲ 통일문제의 저서도 수차 내셨다. 대체적인 방향은.
- 북한을 ‘빗나간’ 혹은 ‘삐친’ 막내동생 다루듯 해야 한다. 져줄 줄도 알아야 하고, 국가에서는 강경과 온건의 적정선에서 지혜롭게 푼다. 정치체제로 보기보다는 종교집단적 성격으로 파악한다. 사이비의 성격이 강하지만 말이다. 곧 망한다는 조급한 기대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스마트 포용정책이란 DJ 포용정책이 진화된 것을 말한다. 협력을 통해 유연한 접근을 하는 것이다. 대북억제력을 강화하며 가능한 접근성과 장점을 결합한 정책안이다.

구제적으로 첫째 경제공동체 형성을 위한 단계적 경제협력 방안인데, 남북 산업연계망을 구축하고 경제협력의 제도화를 이루며, 북한 에너지 문제를 동시 해결한다. 둘째는 문화사회적 교류를 확대하고 북한 인권문제도 점진적 개선 방향으로 다른 정책들과 연계한다. 셋째는 권력구조를 남북 모두 선순환 시키는 구조를 도출하되, 우리사회의 여론 공동체 확립에도 힘쓴다. 넷째는 안보를 위해 대북억지력 강화에 힘쓰되,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대북정책 유연성확보를 전략적으로 병행한다.

▲ ‘교정선교활동’에 오랜 기간 동안 적극적인 활동을 하신 연유는.
- 영어의 삶을 사는 특수계층에 희망을 주는 간증, 강연과 함께 떡, 영치금 등을 넣어준다. 교화위원을 확보해 한 달에 2-3회 한다. 선대본부에 앞장서다 보니 나 자신도 투옥 돼 고초를 겪어 보아 고통을 안다. 고정적으로 20명 정도 분들에게 내가 편지를 쓴다. '정대철 시계'도 나눠준다. ‘국립대학(구치소)에서 교섭단체 차릴 뻔 했다’는 농담도 나왔다. (편집자 주: 정대철저서 출판기념회 시 옥중 생활을 체험한 현역 정치인들과 세시봉 가수, 70년대 연예인들, 배우출신 노장 국회의원 등 내빈들이 형무소에서 정대철의원의 손길을 체험했다는 증언과 함께 헌사가 넘쳤다.)

▲ SNS(소셜 네트워크서비스)에 참여하신 소감과 평가를 들려달라.
- 페이스북에는 매일 한 편의 글을 올린다. 트위터는 필요가 있을 때 가끔 올린다. SNS로 인한 직접 참여민주정치 확대로 새로운 정치문화의 장이 펼쳐질 것이 예상된다. 보완할 점도 앞으로 많을 것이다. 정부, 정당, 국회(대국민주정), 정치의 기능은 약화될 뿐 아니라 심지어 일부 기능은 없어질 수도 있다고 본다. 무빌 폰을 통하여 그야말로 mobile한 정치문화가 성립할지도 모른다. 모든 새로운 현상에 선 순환적으로 대비해야 한다.

▲ 3회 계속 대선 선대본부장을 했으면 국민의 마음을 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 나는 세 번 선대본부장을 했다. 그 결과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이 국민의 선택을 받았고,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 후보에게 선두자리를 내 주었다. 늘 부족하고 격변하는 주어진 환경 가운데 무에서 유를 만들고, 국민의 선택을 살린 것이다.
지금까지 2승1패를 했다. 한 번 더 참여해 3승 1패의 전적을 남기고 싶다. 나의 소망이다.
첫째로 ‘보편적 복지’ 선진사회를 이뤄야 한다. 이것은 국민적 요청이며 시대적 화두다.
두 번째로 남북관계 통일정책을 ‘스마트한 포용정책’으로 이룬다.
세 번째는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개혁이다. 정당개혁, 선거개혁, 권력구조개혁을 하는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분권형 대통령제나 내각제를 선호한다. 대통령 선거를 전망하기에는 지금은 빠르다. 총선 이후 정치 환경이 개편된 이후에야 다소라도 예측이 가능할 것이다. 선거는 내실이 중요하지만, 임박해서는 ‘바람’의 역할이 크다.

▲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 세 번을 선대본부장으로 승패를 가르는 긴박감 속에 후보와 선거대책본부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역사적인 큰 선거들을 치러냈다. 그러나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장소에서 숨가쁘게 돌아가며 움직인다. 책임은 주로 정점에 있는 몇 사람에게 귀속된다.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순간, 선거 후유증에 휩쓸려 감옥소 행을 하기도 하고 몸과 마음의 고생을 하기도 했다. 개인 비리가 아니므로 개인적으로는 제대로 변명할 입장도 마땅치 않다. 거짓증언을 해서라도 조속히 종결시키려 한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다른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일예로 사임한 이상수 전 장관이 증언했다. ‘돈이 다 당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윤창열 굿모닝시티 윤창열 회장이 회고록을 써서 밖으로 내보냈다. 나의 입장이 좀더 정확하게 밝혀질 예정이다. 

박세호 기자 bc4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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