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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분단 70년 생과 사의 625사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남북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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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분단 70년 생과 사의 625사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남북 전쟁
  • 송치만 기자
  • 승인 2018.07.14 05: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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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1부 장진호 전투와 진동리 전투

625전쟁 2부 생과 사의 죽음의 남북전쟁
분단70년 생과 사의 625전쟁 삶과 죽음
사진출처 -CWNTV문화복지신문, 배대균 의학박사, 손담 선생 - 625참전용사

[KNS뉴스통신=송치만 기자] 625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2018년 현재 21세기에 사는 남한과 북한의 국민들의 커다란 파장을 자아내고 있다. 
"누가 왜?" 라는 질문을 던진다. 지구상의 전세계 국가는 237개국가 국제법상 인정된 국가수가 242개국(비독립국 포함)으로 볼 수 있다. 
지구라는 세상은 1%의 최상위 계층이 지구를 지배한다. 

"유대인,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빌더버그 이 4조직은 일맥 상통한다".

지구는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현재 지구 인구 76억명이다. 지구는 모든게 포화상태이다. 지구는 향후 50년안에 지구를 떠나야 한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NWO의 화학무기로 인한 인구감소 정책과 식량으로 인한 인구감소 정책을 쓰고 있다. 지구는 모든 지구인들이 먹고 살만한 돈과 먹을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극소수만 부를 축척하고 아프리카 및 시리아, 예멘, 이디오피아와 같은 나라들은 물과 식량이 없어서 굶어서 죽는것이 다반사가 되었다. 

광활한 우주를 연구하는 NASA는 지구밖의 행성을 1천억개 이상이라 관측한다. 지구는 급변화하고 있고 우주도 팽창하고 있다.
"지구는 아름다운 낙원의 땅 일까?  아름다움을 가장한 죽고 죽이는 지옥일까? 그것이 의문이다"

출처 : Much of NASA’s research into Climate Change takes place through the Earth Sciences Directorate. Credit: NASA

지구의 모든 전쟁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625사변 또한 누군가에 의해서 전쟁은 일어났다. 625 전쟁은 양육강식의 논리로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의 강대국에 휩싸인 정치적 자본 놀이의 처참한 희생양이 되었다. "남침이냐?  북침이냐?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 일까?"

이제는 모든 지구인들이 반이상이 3G, 4G, 5G 인터넷과 정보의 BIG DATA 시대에서 모든 사실을 알 수 있다.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 지구를 흔든 3년간의 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

1950년 새벽 4시 거대한 포탄의 굉음이 한반도에 들린다. 해방직후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 경제지표를 세우는 과정에서 생긴 민족과 민족간 최대 살육의 전쟁 비극이며, 전 세계적의 현재까지 최종의 분단 국가의 치욕적 아픔의 역사를 남기고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7월27일까지 한반도를 핏빗으로 물들게 하였고, 썩어가는 시체는 짐승의 먹이감이 되었다.

1950년대 시대의 집권자들은 남한의 이승만대통령, 북한의 김일성, 미국의 해리S트루먼 대통령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소련의 스탈린,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 중국의 모택동의 집권체재에서 만들어진 비극으로 한반도의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전후하여 극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미국과 소련 등 주변 열강의 견제와 타협에서 비롯되었다.

625전쟁은 북한의 국방비 지출액 약 2조원, 남한의 국방비 지출액 21조원, 북한 정규군 200만명, 남한 정규군 70만명, 북한의 예비군 600만명, 남한의 예비군 200만명, 남한의 방위군500만명, 북한의 전투가능인력 600만명, 남한 300만명으로 남북간 총 가능한 전투 병력은 북한 1400만명, 남한 1100만명으로 집계되었다. 북한의 야포수수 1만 4000여문, 남한의 자주포수 6000여문 숫자상으로 남한의 절대적 열세였다. 하지만 남한은 현대화 최신예무기로 북한의 군수품으로은 월등하였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북한과 남한은 서로 죽이고 죽이는 피가 터지고 살이 뜯기고 창자가 뒤틀어지는 희대의 살육극의 장본인이 된 샘이다. 
이 전쟁은 가희 남북의 전쟁이 아닌 강대국의 전쟁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치적 이념과 사상의 이데올르기로 인한 민족 최대의 잔혹 공포 고어물이 되어버렸다"

출처 : 다음카페 연희동 사람들

625전쟁이 시점에서 이루어진 모든 정황은 이렇다.

[옐친이 전달한 고문서 주요 내용] 

▶1949년 3월 5일 김일성-스탈린 정상회담/ 김일성이의 무력에 의한 조선통일에 관한 소련지도 부의 견해 타진.

▶1949년 8월14일 김일성, 슈티코프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조속한 대남 공격 필요성 주장

▶1950년4월 김일성-스탈린 모스크바에서 남침회담. 스탈린, 북한의 무력통일 과업에 동의.

▶1950년5월14일,스탈린이 모택동에게 “무력통일에 착수하자”는 “김일성의 요청에 동의 한 다” 는 전문을 보냄.

▶5월15일 모택동이 북한의 3단계 남침계획에 동의.

▶6월25일 북의 기습남침 한국전 발발.

▶9월29일 김일성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뒤 스탈린에게 친서를 보내 소련과 중국의 직접 전쟁 개입 요청.
 

사진출처 - cwntv문화복지신문, 배대균, 손담선생

소련이 이 제의를 받아들여 한반도는 북위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에 분할 점령당하게 되어 70년이 넘는 지구상에 하나뿐인 분단 국가가 되었다.

625 사변의 전말은 아래와 같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22일 평양에 진주했고,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2일 후 서울에 진주했다. 분할 점령시 미·소 양측은 한반도의 장래에 대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분할 점령하고 있는 양측의 의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북위 38˚선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잠정적인 것으로 설정한 반면, 소련은 북위 38˚선을 정치적인 경계선으로 항구화시켜 그 북쪽을 소비에트화하려고 했다. 미군과 소련군은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US-USSR Joint Commission)를 구성하고 1946년 3월과 1947년 5월 서울에서 회의를 개최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함에 따라 한반도문제는 1947년 9월에 국제연합(UN)으로 이관되었다.

UN에서는 한반도 문제를 취급하기 위하여 UN 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UNTCOK)을 구성했다. UN은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 5월 31일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UNTCOK가 선거감시임무를 맡도록 했다. UNTCOK는 UN 결의에 따라 한반도에서의 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1948년 1월 한반도에 도착했으나 소련군 점령하의 북한지역에는 소련의 거부로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UN 총회의 결의는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UN은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고, 1948년 5월 31일 미군 점령하의 남한지역에서만 선거를 실시했다. 선거 결과 의회가 구성되고 의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 행정부를 구성하여 1948년 8월 15일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정부가 탄생했다. 북위 38°선 이남에서 UN의 감시하에 대한민국정부가 구성되자 소련은 8월 25일 38˚선 이북지역에서 소련식의 선거를 실시하고 1948년 9월 9일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 발족을 선포했다. 이로써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설정한 북위 38˚선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형성된 냉전체제로 말미암아 최첨단으로 대립하는 가장 긴장된 양극체제의국경선으로 변했다.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2개의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간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이와 같은 대치 상태는 38˚선을 통한 북한 무장공비의 침투사건과 남한 후방지역에서의 공산주의자(빨치산)들에 의한 전복활동으로 나타났다.

사진제공-배대균 박사. 51.5.20 탄약,보급물 지개부대

정부수립 이전인 1946년 9월 서울에서의 철도파업, 10월 대구폭동, 1948년 제주 4·3사태와 그 후의 한라산 일대에서의 게릴라전 등을 비롯하여, 1948년 10월 20일 여순반란과 지리산·태백산 및 오대산 일대에서의 빨치산 활동 등으로 남한의 치안은 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이에 덧붙여 1948년 11월 17일 오대산 부근으로의 북한군의 침투로부터 시작하여 북한의 남침 전까지 38°선 일대에서도 10여 차례의 북한 공산군에 의한 침투가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장세력에 의한 전복활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북한의 김일성은 최종적인 수단으로 전면적인 남침으로써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을 성취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로인한 625전쟁의 최대의 참극의 총제적 인원은 다음과 같다.

625전쟁으로 인한 총 피해자수는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명, 부상자45만명, 실종포함 60만9천명, 북한군 사망, 부상, 실종 포함 80만명, 유엔군 사망자 5만 8천명, 부상자 48만명, 실종자 포로 총 54만 6천명, 중공군 사망자 13만 6천명, 부상자 20만8천명, 실종자 포로 사장자 97만 3천명, 남한 민간인 학살, 부상, 납치, 해방불명 30만명  모두 100만명의 민간인 피해 를 입었다(자료출처 한국국방부 군사 편찬 연구소 자료)

"삶과 죽음,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선 남과 북의 전쟁은 누구의 탓이라 할까? "

출처 : pacificcross-cultural

세상을 움직이는 강대국 힘의 원리에 의한 욕심의 희생양이 된 백의 민족의 한이라 볼 수 있다. 한민족의 피끓는 청춘들의 영혼들의 아우성이 들리지 않는가? 한반도의 3면이 바다로된 22만KM의 작은 면적의 한반도인(남,북한)이여!  세상의 시작과 끝이 되는 그곳에 사는 대한인의 아픈 과거가 지금도 역사는 흐르고 있다.

심장이 파동을 치고 피가 쏟구치는 역사! 한반도 인은 깨어나야 합니다. 한반도 인은 깨우쳐야 합니다. 한반도 인은 온 마음과 정신을 열어서 한반도의 평화와 지구의 평화를 함께 지켜내야 합니다. 

진정한 광복은 언제올까요? 그날이 오면(심훈)의 시처럼 조국 광복의 그날이 찾아 왔을 때, 강대국에서 독립적 국가가 되는 날!!! 그날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써 진심으로 간절하게 염원하며 절절히 호소하는 생과 사의 625전쟁의 역사를 국민 모두가 온몸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한반도의 진정한 광명과 독립의 그날을 위하여 별과 구름은 바람을 타고 오늘도 날아갑니다."
 

<편집자 주 :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송치만 기자 kcata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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