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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단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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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단 비
  • 윤석구 칼럼니스트
  • 승인 2011.12.2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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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서의 하루하루는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시간 여행이었다. 매일 매일이 업무의 도전이었으며 임무수행의 성취에 대한 뼈저린 감동이었다. 우리가 모래바닥을 파면 팔수록 oil money(오일머니)가 그대로 돌아온다는 기적의 현장이었다.

아랍인들이 나에게 여러 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해서 극동의 조그만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세계적인 기술의 소유자이며, 근면하고 부지런하며 밤잠을 설쳐 가면서 열정적으로 일하는 지에 대해서 이구동성으로 질문하는 것이었다. 이럴 때마다 내가 마치 국가대표의 운동선수나 된 것처럼 가슴이 뿌듯했고 의기양양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로, 주택 심지어 항만공사까지 전부 우리의 독무대였다. 참으로 우리는 대단한 국민이었다.

당시 근로자들은 1시간의 오버타임에 일정액의 인센티브를 받았고 점심시간 전후 약 두 세 시간은 더위로 'dead hour'(더위로 일을 못하는 오수시간)였기 때문에 야밤이라도 심지어 횃불을 치켜들고 공기를 맞추기 위해서 또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우리는 그토록 일에 극성을 부렸었다.

그러나 일이 이 정도로 이루어지고 할 일을 어느 정도 마쳤기 때문에 이제 본연의 업무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의무감에 많은 갈등을 갖고 1년 만에 귀국했다. 6월에 돌아왔으니 학교도 자리 얻기가 힘들어 지방을 모색하던 중 천안의 모 학교에 둥지를 틀고 근거지를 이곳에 마련하고 이제 교사의 길을 다시 걷기로 했다. 실은 중동에서 잠자리에 누우면 밤마다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셔서 ‘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니?’하며 여러 번 책망하셨던 일이 더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이 학교는 상업고교로 중학교와 병설이 되어있었고 교직원 수도 8 ‧ 90여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학교였다. 이사장이 기독교 신자라서 직원회의 때마다 교사들이 돌아가며 기도하고 짧은 채플을 갖고 있었다.

기왕 학교에 들어왔으니 이제 대학으로 진출해 보리라는 마음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집에서는 남편과 가장, 그리고 학교에서는 영어선생, 대학원에서는 학생의 신분, 그야말로 1인 4역을 해야 하는 바쁜 일정에 돌입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일과가 끝나고 나면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싣고 서울역에 하차하여 지하철을 이용, 휘경역에 도착 도보로 외대까지 가서 수업을 하고 다시 야간열차를 이용하여 집에 돌아오는 일을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감내하면서 내 몸을 옹골지게 다그쳤다. 또 지각 한번 없이 정시에 등교하니까 서울에서 근무하는 동기생들이 나 때문에 지각을 할 수 없다고 볼멘소리를 하곤 했다.

한편 아내는 네 째를 임신하여 무거운 몸에도 모자라는 학비를 여기저기에서 빌려 오느라고 입덧까지 잊을 정도였다. 무던히도 고통을 감내하는 아내에게 딸 셋도 키우는데 넷은 못 키우겠냐 하면서 수없이 격려하고 위로했지만 정작 장본인인 나는 애가 타서 재가 될 지경이었다. 그 증거로 당시의 학기에 해당하는 학점을 보면 입증이 되고 있다.

드디어 아내가 진통이 오기 시작하여 병원에 입원시키고 나는 입원실에 혼자 남아 평소에 드리지 않았던 기도를 간절히 드렸다. 이때는 아들이고 딸이고 가 문제가 아니라 그저 산모가 순산하기만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기도했다. 한참 후에 병실이 조용하여 방문을 살짝 열고 수술을 막 마치고 나오는 의사 뒤를 살며시 따라갔다. ‘ㅇㅇ이요’하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 더 가까이 다가갔다. ‘100% 아들입니다.’라고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때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에서 ‘삼천리가 만원이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의 산아제한 슬로건이 나라를 휩쓸던 때였다. 아울러 네 째 부터는 의료보험 혜택이 이듬해부터 적용되지 않는 다고 예고되어 있어서 당일에 출생신고를 하였더니 아들의 생일이 12월 29일로 되어 있다. 그랬더니 어미는 힘들어 죽겠는데 위로는커녕 아들이 그렇게도 좋더냐고 하고, 아들은 3일 만에 한 살 더 먹었다고 지금도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마침 학교가 방학 중이라 일직교사만 근무하고 있었는데 평소에 절친한 친구라서 득남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그날따라 모 식당에서 저녁 6시에 모 대학 입시 담당자들과 저녁식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한참 자리가 무르익어갈 무렵에 일직교사였던 친구가 긴급동의가 있다고 큰 소리로 좌중을 향해 외쳤다. ‘에 오늘 아침 득남한 사람이 있으니 축배를 듭시다’하면서 내 이름을 거명하는 것이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하여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너도나도 전부 나한테 집중포를 날리는데 그날 밤은 천안이 몹시도 시끄러웠다.

결국 그때는 몰랐지만 천안으로 내려 온 이유는 내가 직장을 얻기 위함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아들을 예비해 주신 축복의 길이었으며 내 인생의 대 역전극을 마련해 주신 푸짐한 잔칫상이었다. 또한 대학원을 졸업하여 교육학 석사학위를 당해 연도에 획득하는 쾌거를 거두어들이기도 했다. 이는 다행이도 상위 1%이내에 해당되도록 열심히 노력한 결과이었다.

이제 큰 아이가 자라서 머지않아 중학교에 입학하는 일이 생겼다. 서울에 내 집을 두고 객지에서 살았으니 자리를 옮겨야 하는 문제를 놓고서 아내는 기도 중에 있었다. 나는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안 되어 있어서 온 식구들이 모두 잠든 고요한 시간에 마루에 나와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소파에 머리를 댄 채 ‘하나님 어떻게 해요?’만 되풀이 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 그 다음 주일에 우연히 모 중학교 영어선생이면서 주일학교 교사인 최 선생이 혹시 서울에 가고 싶은 생각이 있느냐고 의중을 물어 와서 지금 그 문제를 놓고 기도중이라고 했더니 시내 모 여자고등학교 영어선생과 함께 이력서를 지참하고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가서 한번 면접을 보라는 희소식을 전해주었다.

둘이 만나 서류를 들고 그 학교 이사장 실에 들어갔는데 면접관이 무려 20여명 되었다. 면접을 마치고 눈에 익은 분이 한분 계셨는데 바로 고등학교 은사님이셨다. 먼저 인사를 드렸더니 반갑게 손을 잡아주시면서 오랜만이라고 격려를 해주셨다. 잠시 뒤에 결정이 나고 3월2일에 부임하라는 인사명령이 떨어졌다. 이 날이 그 해 2월 24일이었으니 학교 측도 몹시 일정이 바빴던 것 같았다.

이리하여 4년여 만에 내 집에 들어와 새 학교에서 긴장 가운데 업무를 시작했다. 오자마자 3학년 이과 반을 담임하는데 공자의 3락 가운데 하나를 얻은 즐거움과 두려움이 동반하여 찾아왔다.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ysk0848@hanmail.net

 

 

 

윤석구 칼럼니스트 ysk08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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