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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줄 보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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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줄 보라매
  • 윤석구 칼럼니스트
  • 승인 2011.11.28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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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식장까지 오셔서 비디오카메라로 세세하게 촬영해 주신 Baker목사님과 가족들이 사진을 현상하여 졸업식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렸으며 어떻게 저런 모습이 나올 수 있을까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거의 40여년이 지났으니 더욱 놀랄만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얼마나 미국이 물질문명의 발전 면에서 우리를 앞서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대학졸업 후에 남은 문제는 유학, 군대 그리고 취업이었다. 유학에 관하여 Baker 목사님과 상의한 결과 공군장교가 되어 미국으로 가면 병역문제도 아울러 해결될 수 있다고 말씀하셔서 공군장교의 길을 걷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일자리가 여유가 있어서 여러 곳을 선택하여 취업할 수 있었으니 지금과 비교하면 엄청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공군장교가 되는 길은 응시부터 시작하여 합격 그리고 훈련 등이 초인간적인 인내와 땀과 눈물을 요하는 극한적인 노력의 결정체였다. 4개월 훈련기간을 4등분한 다음 한쪽을 네 쪽으로 나누어 소위계급장을 수양록에 그린 다음에 1주일이 지날 때마다 하나씩 연필로 새까맣게 지워 나갔다. 이는 아마도 하루하루가 훈련과 기합의 연속이라 너무나 견디어 내기가 힘들어 마음의 여유를 어떻게 해서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그래도 16주라는 시간은 엄청 더디 가더이다.......

3월에 입교하여 7월에 임관하게 되어 있었는데 당시 대전 날씨는 참으로 변화무쌍하여 입교하고 얼마 뒤에 함박눈이 펑펑 내린 적이 있었다. 기숙사에서 내 멋대로 기상하고 생활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잠결에서 깨어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기상나팔 소리에 어느새 그 딱딱한 침상에 정이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왜 그렇게 일어나기가 싫었는지! 단잠을 깨우는 그 소리가 너무 야속하기만 했었다. 눈바람 속에서도 저 나무들이 실록으로 우거져야 나한테 다이아몬드가 안겨 질 텐데 하는 희망을 안고 공군기교단의 연병장을 무던히도 뛰고 달리고 박박 기어 다니곤 했다. 

사전에 집합하여 아침점호를 취해야 하는데 군장을 다 차려입고 분초를 줄이려고 워커를 질질 끌고 달려가면서 끈을 잡아매야 했으니 그 모양새는 과연 가관이었다. 간신히 집합하면 당직사관은 다시 명령을 내려 취침과 집합을 무려 대여섯 번 하고 나서야 식성이 풀렸는지 억지로 점호를 취하기도 했었다. 그러고 나서 세면을 하고 식당을 향하여 대열에 맞춰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목청을 돋우어 군가를 부르며 발을 맞춰 행렬을 했다. ‘식사개시! ‘의 구령과 함께 트레이의 밥이며 반찬을 숨도 쉴 새 없이 사정없이 몰아넣고 ’식사 끝! ‘ 구령과 동시에 수저를 놓고 식기와 잔반을 처리하고 다시 집합했다. 웬 직각보행이 그렇게도 많고 트집잡힐 일이 많이 있었는지……. 

한 번은 조식 후에 약 2km 정도 떨어져 있는 연병장에 전원이 구보로 뛰어간 적이 있었다. 3월인데도 영하 5도 정도의 혹한이었다. 그런데도 각개전투 시간이라 집총하고 맨몸으로 엎드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전날 밤에 내린 진눈개비가 녹아서 얼어붙어 있는 게 아닌가! 모두가 쭈뼛쭈뼛하며 망설이니까 교관은 우측부터 그 무시무시한 빠따로 철모를 내리치는 소리가 연병장의 차디찬 바람소리와 함께 메아리 쳤다.

그러자 무서운 나머지 나는 자신도 모르게 맨 살 몸뚱이를 바닥에 철썩 대고 엎드려서 굴러 이동을 했다. 집총자세로!……. 굴러가다 보니까 내가 의도했던 방향과는 엉뚱한 곳에서 멈추게 되었다. 아침이라고 먹은 음식물들이 전부다 흘러나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었고 그 순간 얼어붙고 있었다. 이미 몸도 얼어서 무감각의 상태가 되었다. 

당시에는 어찌 인간으로 이 정도까지 내려가게 하는가 하고 자조적인 어투로 불만을 토로했지만 온갖 힘과 정신력으로 훈련을 마친 후에는 앞으로 내 인생에서 이런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며 설사 이러한 환경에 처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를 교훈삼아 일어설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갖게 해 준 것에 대하여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시인 롱펠로우가 ‘인생의 찬가’에서 노래한 것처럼 인생의 전쟁에서 영웅이 되게 하는 것이다. “In the world"s broad field of battle,  In the bivouac of Life,  Be not like dumb, driven cattle!  Be a hero in the strife! (세계의 드넓은 전장에서, 인생의 야영장에서, 말 못하는, 쫓기는 가축이 되지 말라! 투쟁에서 영웅이 되라! )” 

성서에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준 적이 없으며 그 고난을 겪고 나면 영광의 축복 고지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에 당하고 있는 고난의 아픔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후에 몰려올,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바라보고 애써서 어려움을 극복하겠다는 극기의 자세가 절실히 요구된다 하겠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한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달이 네 번 바뀐 뒤 7월 초하룻날이 밝았다. 하늘도 땅도 모두다 어제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 지겨운 땀내 나는 전투복 대신에 공군정장에 다이아몬드를 양 어깨에 단 다음 헝겊을 덧씌우고 그토록 혹독했던 연병장으로 임관식을 위하여 출발했다. 은빛 줄 보라매가 붙여져 있는 장교 모자를 쓰고 옆 친구와 내 어깨에 가지런히 꼽혀있는 소위 계급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번뜩이는 희망의 빛을 보았다. 인고의 날이 단맛 빛으로 뒤바뀌는 복된 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하객들 중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자그마한 체구의 어머니……. 고등학교 떼에는 자식의 학비와 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심지어 낭자 속 머리까지 잘라 마련한 돈을 허리춤에서 내어주시며 안 그런 척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시던 어머니! 나를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하다고 여기셨는지……. 모든 비바람을 혼자서 모두 막아내시며 자식 교육을 위하여 몸소 희생하셨던 어머니는 분명 우리 집의 작은 예수시었다.

어머니에게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리며 은빛 보라매가 비상하는 공군장교 모자를 씌워드렸다.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나의 성공을 말없이 눈물로 축복해주시었다. 붉어진 그 눈 속에는 ‘장하다 아들아!’하고 무언의 메시지를 써가고 있는 듯 보였다.

이제 어머니는 이 글을 천국에서 읽으시면서 계속 기도하고 계시리라 확신한다.

ysk0848@hanmail.net

윤석구 칼럼니스트 ysk08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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