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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탐방 코스] 청렴했던 선현들 '충절의 고장' 5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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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탐방 코스] 청렴했던 선현들 '충절의 고장' 5곳
  • 박세호 기자
  • 승인 2011.10.23 1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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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역사 및 인물들의 교육적 효과를 높인 여행

[KNS뉴스통신=박세호기자] 국민권익위원회가 전국의 공무원 및 일반국민들과 청소년들에게 국가에 충성하고 무엇보다도 자신과 가족의 신변관리에 엄했던 훌륭한 선조들의 공적을 밝히고 그 유적들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교육적인 효과와 의의가 크다고 생각이 된다. 

 맹사성의 고택 세덕사

1) 청렴위인 맹사성(1360∼1438/

공민왕 9년∼세종 20년【맹사성 고택 - 세덕사】고려 말 조선 초의 재상. 여러 벼슬을 거쳐 세종 때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고 우의정·좌의정에 올랐다. 《태종실록》을 감수하고 《팔도지리지》를 찬진하는 등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작품에《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있다.고향에 다닐 때에도 남루한 옷차림으로 행차하여 그 곳 수령이 잘 알아보지 못하고 야유를 했다가 나중에 정승이었음을 알고 도망치다 관인을 연못에 빠트려 훗날 그 연못을 인침연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검소하였으며, 청렴결백하고 절조를 지키는 인품으로 공평무사한 일 처리, 민정시찰 등을 통해 백성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애민정치를 적극 실천하였다

 

2> .<청렴위인 황 희(1363∼1452/공민왕 12년∼문종 2년)

반구정조선 초의 문신.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으나, 신왕조의 요청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대사헌, 병조, 예조,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고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한 조선의 최장수 재상이다. 과감하게 바른 말을 하는 성품으로 자주 파직과 복직을 당하여 관료로서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으나 태종·세종을 거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청백리이자 명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정치 일선에서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건국 초기 조선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청렴위인 3> 이 이(1536∼1584/중종 31년∼선조 17년)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3세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을 하고, 이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고,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여 일선 정치에 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다.

    자운서원

동호문답(東湖問答),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사단칠정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 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또한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국력 부강을 위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만인평등의 입장에서 정치의 주체를 민(民)으로 규정하고 언로의 개방과 민의의 광범한 수렴을 통한 여론정치를 주장한 현실참여형 관료이자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수기치인형 청렴위인이라 할 수 있다.

 

<청렴위인 4> 이순신(1545∼1598/인종 1년∼선조 31년)

임진왜란의 왜침을 막아낸 구국의 명장. 1576년(선조 9) 32세의 나이에 식년무과 병과로 급제한 뒤 함경도 변방의 동구비보 권관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 사

  현충사 본전
복시 주부, 조산보 만호, 정읍 현감 등을 차례로 역임하다 1591년 2월 서애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탁되었다. 이후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여 군사 조련,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 등 무기 제조, 진지 보수 등에 힘썼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연전연승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옥포대첩,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 등을 거치며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모함으로 파직당하고 백의종군하였으며, 이후 복권되어 명량대첩의 대승 후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미래에 대한 준비, 청렴함과 강직함, 기본과 원칙을 기반으로 한 신뢰의 리더십 등은 그의 혁신적인 전략과 함께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발견·재해석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청렴위인 5> 이원익(1547∼1634/명종 2년∼인조 12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관료.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호조좌랑, 예조정랑, 정언,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이조판서 재직 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난길을 수행하였으며, 이듬해 평양 탈환작전에 공을 세워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선조, 광해군, 인조 3대를 걸쳐 여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오리 정승으로 널리 알려졌다.

 

     관감당

 

박세호 기자 bc4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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