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선의’와 ‘대연정’, 안희정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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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선의’와 ‘대연정’, 안희정이 옳다
  • KNS뉴스통신
  • 승인 2017.03.06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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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다크호스로 부상했던 안희정 충남지사가 ‘선의’ 발언 이후 주춤한다고 한다. 왜 일까? ‘선의’ 발언 때문일까? 아니면 ‘선의’ 발언에 대한 오해 때문일까? 발언의 당사자는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었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정숙경 성균관대 겸임교수·사회학 박사

그런데 발언과 무관한 필자야 말로 심기 불편하고, 화까지 나려한다. 다양한 입장과 이해로 얽혀진 현대의 사회관계 속에서 ‘선의’란 상대인 인간을 이해하는 전제 조건일 뿐이다.

마치 정작 범죄 혐의를 받는 피의자를 그 죄가 확정되기 까지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봐야 하는 것처럼, 인간의 다양한 의도에 대해 선의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대화와 타협, 공존의 민주주의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반대했는지,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실천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 봐야한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모든 발화 즉 발언은 발화의 주체·발화되는 맥락에서 진실이 규명되며 이해되어야 한다는데, 이것이 발화의 기본 구조이다. 언어는 발화의 기본 구조 내에서 어떤 특성을 지닐 수 있으므로 비판과 분석이냐 혹은 통섭이냐를 따지기 전에 모든 발화는 발화되는 맥락에서 발화주체의 의도, 진정성 혹은 그 진실이 드러난다.

발화 주체인 안희정 지사는 2017년 대통령 출마 선언한 정치인이고, 그런 그가 탄핵정국을 초래한 박근혜 대통령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선의’였더라도 법과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던 평가적 발화를 ‘선의라면 다 용서할 것인가’라며 비난하는 것은 분명 와전이며 곡해다.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주장하는 데에 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없겠는가! 플라톤의 독배는 그때 그 시대만이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자들에게도 요구된다. 자기주장만이 옳다며 타인을 전혀 수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평화적 공존이 가능한가! 선의야말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민주주자들의 기본 소양이자 태도, 최후의 보루가 아닌가!

그러니 곡해부터 하는 폐쇄적인 태도가 혹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 봐야 하지 않을까.

탄핵정국으로부터 얻는 역설적인 교훈은 대연정이 불가피한 정치 현실에 대한 절박하고 시급한 인식이다. 그런데 2003년 고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한 대연정과 안희정이 제안하고 있는 대연정은 동일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전자가 정몽준의 지지철회로 인해 국가운영을 위한 인적 자원마저 고갈된 상태에서 국가운영을 잘해 보려는 그야말로 이상주의자의 고육지책이었다면, 후자는 그로부터 십 여 년이 지난 한국의 정치현실, 즉 대통령제라는 권력독점의 폐단으로부터 오는 갖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자 동시에 지방분권 이후 권력분점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전과 달라진 정치권력 운영구조로부터 파생한 생산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다.

언제까지 양당구조 속에서 죽일 듯이 경쟁하여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자기진영 논리에 빠져 국익과 공익을 모른 체하며 국정을 운영할 것인가! 언제까지나 공약을 빌미로 무분별하게 국가예산을 전용하고, 진영에게 혜택을 부여하는 정치적 후진성이 건강한 국가발전을 발목잡고 방해하게 방치할 것인가!

소통과 대화가 가능한, 공정한 경쟁과 기회, 협의와 공존이 가능한 민주사회를 꿈꾸는 것이 아니었는가. 마치 대연정이 청산되어야 할 적폐 세력과의 연대인 것처럼 생각하는 ‘정치적 소아병’이 없어지지 않는 한 끊임없는 정쟁만 반복될 뿐 정치 발전도, 한국의 미래도 없다.

정숙경 성균관대 겸임교수·사회학 박사

 

KNS뉴스통신 kns@kn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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