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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풍습에 ‘디지털’이 접목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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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풍습에 ‘디지털’이 접목될 수 있을까
  • 임택 기자
  • 승인 2017.01.18 16: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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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택 경제부장

“디지털시대의 도래와 함께 장례문화를 비롯한 전통풍습과 문화의 틀은 바뀔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상장례 관련 업계와 학회에서 한창이다. 빈소를 직접 방문하는 것 보다 사이버 공간을 이용하여 문상을 하는 것은 편리하다. 그러나 정으로 엮어진 전통의 우리 장례문화는 시대변화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1996년 4월3일 문을 연 연세의료원 장례식장은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를 혁신하려는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당시 거의 모든 영안실(장례식장)은 장례업자에게 위탁된 상태로 병원의 묵인 하에 각종 비리가 횡행했다. 빈소를 이용하는 비용은 병원당국의 협의 하에 일정한 가격이 적용되고 있었으나 수의나 관 등 장례용품은 바가지요금 그 자체였다.

염습을 하는 과정에서 염사들이 유가족에게 뒷돈을 요구하기 일쑤였고 장례식장 종사자들과 영구차 기사들의 뒷돈 요구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이런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장례의 제반절차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유가족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망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비용지출도 관대하게 생각하는 풍조 또한 이러한 영안실 비리를 조장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 장례의 전 과정에서 비리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폭력조직까지 장례식장의 사업에 개입하기도 했다.

문제는 장례식장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상객들도 문제 투성이었다. 1982년 1월5일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기 전에 문상을 가는 것은 바람잡이 남성들에게는 바람을 피우는 기회를 제공했다. 회사 동료나 상사의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귀가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통신수단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영안실은 가관이었다. 문상을 마친 조문객들은 끼리끼리 모여앉아 술판을 벌이고 화투로 도박판을 벌였다. 술에 취하면 영안실 주변에 아무렇게나 방뇨를 하고 도박을 하다가 시비가 붙어서 문상객들 간에 주먹질이 오가면 경찰이 출동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당시 연세의료원은 이러한 장례문화를 개혁하기로 했다. 1996년 4월3일 봉헌된 의과대학 연구동 지하에 새로운 장례식장을 마련하면서 종전의 영안실을 폐쇄했다. 제일먼저 영안실 개념을 장례식장으로 바꾸었다. 연세의료원 장례식장은 장례업자에게 위탁을 주지 않고 재단사무처에서 직접 운영하는 것으로 했다.

연세의료원은 이 장례식장을 4무(無)장례식장으로 변모시켰다. 종전의 영안실에 있었던 가장 큰 4가지 폐해를 일소하고자 했다.

그 첫째는 ‘바가지 없는 장례식장’이다. 장례에 쓰이는 물품들을 A B C의 3개 등급으로 규격화해 상을 당한 집안의 형편에 맞게 물품을 구입해 사용토록 했다. 염사나 종업원 등의 뒷돈을 받은 것이 확인되면 그 즉시 해고를 했다.

둘째는 밤샘이 없는 장례식장이다.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자정이 되면 방송을 통해 문상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상주가 필요하다고 하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겼다. 상주들도 자정이 지나면 문상을 받지 않고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밤새 조문객들이 술 먹고 도박판을 벌이는 일은 자연스레 없어지게 됐다.

셋째는 술이 없는 장례식장이다. 장례식장의 구내식당을 제외하고는 술을 마실 수 없게 했다. 각각의 빈소마다 음식을 마련해 문상객들을 접대하던 것을 금지하고 장례식장 내에 구내식당을 이용토록 하면서 식권을 주었다.

넷째는 도박 없는 장례식장이다. 문상을 와서 순서를 기다리거나 조문 후에 지인들끼리 환담을 나누는 경우에는 바닥에 퍼질러 앉을 수 없도록 실내에 고정식 의자를 설치했다. 도박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근원적으로 없애 버렸다.

하지만 당시 연세의료원이 시도한 장례문화 개선방안은 몇 가지 면에서 찬반논쟁이 있었다. 여러 언론에 그 취지가 알려져 건전하고 신선한 장례문화로 이론적으로는 많은 각광을 받았다. 상주들의 묵시적인 지원도 있었다. 밤새 조문객들에게 시달리지 않게 되었고 장례비용도 1/3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시 논쟁의 초점은 장례가 망자를 떠나보내는 엄숙한 예식이면서 한편으로는 유족들과 일가친척 및 지인들이 이를 통해 소통하고 결속하는 잔치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연세의료원은 지나친 제한을 하고 있었다. 지방에서 온 유족들의 친지도 문제였다. 이들은 밤샘을 하지 못하면 숙식에 문제가 생기는 등 일부는 찬성도 있었지만 크게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연세의료원이 시도한 장례문화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유는 한가지다. 고인의 북망산천 가는 길에 그래도 마지막 이별을 하기 위해 장례식장에 들러야 하는 것이 한국의 장례문화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을 어찌 제도적인 관행으로 끊을 수가 있겠는가.

임택 기자 it867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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