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끼’ 목표와 ‘대학입시’ 벽 사이 간극은 얼마나 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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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끼’ 목표와 ‘대학입시’ 벽 사이 간극은 얼마나 큰가
  • 서혜정 기자
  • 승인 2016.09.0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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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문화-3] 교육이 사는 길 '사이' 다듬기에 달려

하루가 멀다 하고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정치권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면, 갈라지는 이유, 내세우는 명분, 반대하는 논리 등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굴함을 느낄 때가 있다. 옆길을 마다하고 외곬으로 살아가는 것이 여간 힘든 세상인가 보다. 제 의지로 한 길을 걷다가도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히면 어딘가에 속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조강지처(糟糠之妻)라는 말이 있다. 조(糟)는 지게미, 강(糠)은 쌀겨라는 뜻으로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어가며 고생한 본처를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여론이라는 등을 업고 자신에게 득이 된다면 얼마든지 떠나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 어느 재벌 회장은 보무도 당당하게 혼외 자식을 밝히는 세상이니, 우리 학생들에게 과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있음’과 ‘없음’의 사이는 중간 항이 없는 ‘모순관계’이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나 실명과 가명의 관계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반대관계’는 중간 항이 있는 관계를 말한다. ‘크다와 작다’, ‘진보와 보수’, ‘예쁘다와 밉다’와 같은 것들이다.

이에 다른 유형으로 ‘상대관계’가 있다. 대응되는 다른 개념을 통해 이해되는 단어로, 그 의미가 정반대가 될 때 상대관계가 된다. ‘어버이와 자식’, ‘스승과 제자’, ‘남편과 아내’가 그 예이다. 남자라 해서 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이 존재함으로써 아버지라는 관계가 맺어진다. 제자 역시 자신을 가르치는 누군가가 있기에 누구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다. 결혼하지 않은 독신남이나 독신녀에게 남편 혹은 아내라고 부르지 않는다. 두 남녀가 결혼할 때 비로소 남자는 남편, 여자는 아내가 되는 이치다.

교사와 학생은 상대관계다. 물론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상호 자연스럽게(혹은 불편한 동거) 받아들이는 관계다. 그렇기 때문에 대립항의 무게가 대체로 균등하게 자리하는 모순이나 반대 관계와 달리 상대관계는 다소 유동적이다. 모순이나 반대 관계는 집단행동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상대관계는 다분히 개개인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상대관계는 학교 공동체 안에서 다시 세분화 된다. 교사는 ‘교장과 학생’ 사이에서, 교장은 ‘학부모와 교사’의 사이에서, 학생은 ‘부모와 교사’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한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교사는 ‘수월성과 평등성’(입시교육과 인성교육) 사이에서, 교장은 ‘이상과 현실’(결과와 과정)의 사이에서, 학생은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 역시 갈등하며 몸부림을 한다.

교육이 사는 길은 ‘사이’를 다듬는 일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교육 환경은 하나같이 ‘사이’가 좋지 못하다. ‘꿈과 끼’라는 교육목표와 ‘대학입시’라는 벽 사이의 간극은 너무 크다. 교육공동체 안에서의 갈등과 반목의 골은 그 거리감을 좁히기 쉽지 않은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 사이에 자리하는 온갖 건강하지 못한 이념적 잣대들이 멋대로 칼을 휘두르고 있다.

학부모 역시 공교육과 사교육의 사이에 두 발을 넣고 허우적대고 있다. 학교 안 역시 교권과 학생의 인권, 그 간극을 넓히고 있다. ‘스승의 은혜’보다 ‘경제 논리’가 더 강한 호소력을 지닌 지 오래다. 학생중심, 배움 중심으로의 전환이 교육적으로는 바람직하지만 이 역시 교사의 얼을 밑바탕에 제대로 깔지 못한 경우에는 ‘얼빠진’ 노릇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사이가 좋으면 만사 해결된다. 좋은 사이가 되도록 걸림돌을 제거해보자. 무엇이 가르침을 방해하는지, 배움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지, 교사의 마음에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 자리하고, 교장의 마음에 교사와 학생의 마음이 동시에 놓이고, 학생의 마음에 부모의 마음과 선생님의 마음이 함께 자리한다면 절대 사이가 벌어질 리 없다. 이렇듯 좋은 사이로 가는 지름길은 서로가 삼각형의 가운데 지점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서로서로 ‘가운데’로 향하는 마음이 바로, 사이좋은 관계로 가는 첩경이다.

대신 끝까지 자신에게는 저항을 하자. 저항은 ‘어떤 힘이나 조건에 굽히지 아니하고 거역하거나 버티는 것’이다. 저항해야 할 것을 ‘밖’에 두지 말고 내 ‘안’에 두자. 아울러 교단을 떠나는 순간까지 홀로 설 힘을 기르자. 알고 있는 수준으로 앎을 포장하지 말고 알아야 할 것으로 앎을 키워가자. 그런 다음에는 깊은 생각을 담아 효율성 높은 방안을 강구해 ‘남다른’ 방책을 넌지시 건네 보자.

 

나이 들수록 자칫 ‘뒷방살이’ 격을 자칭하는 것은 모두를 위해 조심해야 한다. 설령 교무실을 ‘사랑방’ 분위기로 연출해 격의 없는 관계를 맺기 위함이라고 하더라도 ‘직무’의 연장이어야 함은 잊지 않아야 한다.

‘사이사이’에 교육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임광찬 전남영흥고 수석교사

 

서혜정 기자 alfime@kn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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