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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김지원의 세상 엿보기] 4.19혁명을 되돌아보는 5월의 상념(想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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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김지원의 세상 엿보기] 4.19혁명을 되돌아보는 5월의 상념(想念)
  • 김지원 大記者
  • 승인 2015.04.30 12: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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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원 大記者
[KNS뉴스통신=김지원 大記者] 미명을 뚫고 찬란히 솟아오르는 영롱한 빛이 연초록으로 물든 산하의 아침, 싱그러운 들꽃이 감미로운 향기로 코끝을 자극하는 오월의 봄이다. 며칠 전 내린 비는 세속에 찌든 필자의 마음까지 말끔히 씻어주며 대지는 푸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1960년 4월,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로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독재 권력에 항거한 4·19혁명이 금년으로 55주년을 맞았다. 4·19는 한동안 혁명 또는 의거로 지칭되었으나, 5·16이후에 의거로 공식화되었다.

그런데 1960년대 말부터는 이에 대한 개념이 의거에서 4·19로 바뀌었다. 4·19혁명에 대한 역사적 가치판단이 정립되지 못했던 탓이다. 물론 이를 연구하는 전공학자들은 4·19 또는 4·19혁명 등을 혼용 사용해 왔지만, 중·고등학교 교과서나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은 4·19 혹은 4·19의거였다. 이는 수십 년간 이 땅에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꽃피우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하다. 이처럼 오랫동안 의거나 4·19로 불리던 혁명에 대한 평가가 1993년에 이르러 비로소 그 의의와 정신이 재조명되어 혁명으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공원묘지로 지정되어 서울시에서 관리하며, 성역화 사업을 거쳐 1995년 국립묘지로 승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1997년에는 최신 기법의 전시실 기능을 갖춘 기념관을 개관함으로써 4·19혁명을 계승할 정신적 산교육장임과 동시에 우리나라 민주이념의 최고 성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혁명을 초래하게 된 근본원인은 종신집권(終身執權)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의 지나친 정권욕(政權慾)과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누적된 것에 원인이 있다. 이승만은 환국(還國) 이후 어떤 민족지도자보다도 가장 두터운 국민적 지지와 신망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수완으로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했다.

이러한 국민적 신망은 그로 하여금 ‘자신밖에 없다’라는 오만과 카리스마적 권위의식을 갖게 하였고, 끝없는 권력욕과 독재성을 조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자신의 종신집권과 독재권력 강화를 위해 온갖 정치파동과 비리(非理)를 자행함으로써 점차 국민들의 지지를 상실해갔다. 그는 6 ·25전쟁 발발 직후 서울 사수(死守)를 공언하고도 자신과 정부는 피난을 떠남으로써 국민을 배신하였다. 또한 국민방위군사건(國民防衛軍事件)으로 많은 청년들을 희생시켰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집권을 위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국민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1952년 대통령직선제(直選制) 개헌을 위한 정치공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체포 연금(軟禁)하여 위협하는가 하면, 소위 백골단(白骨團)ㆍ민족자결단(民族自決團) 등 정체불명의 단체가 나타나 국회의원들을 협박하는 사태가 벌어 졌다.

그리고 개헌을 반대하는 의원들의 출신 지역에서는 난데없이 국회의원 소환을 외치는 성토군민대회(聲討郡民大會)가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기도 하였다. 당시 소위 부산정치파동(釜山政治波動)으로 불리는 일련의 정치테러 사건과 이때 통과된 발췌개헌(拔萃改憲)으로 이승만에 대한 국민의 신망은 더욱 땅에 떨어졌다.

이제 피의 화요일이라고도 불리는 4.19혁명이 일어난 지 이제 마악 반세기가 지났을 뿐인데, 우리들 기억에서 너무도 빠르게 희미해져 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4.19는 단순히 학생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참여한 민중항쟁이었다. 그것은 독재정권의 부정에 항의한 자유민주주의운동이었으며, 우리 민족 최대의 숙원인 분단을 극복하자는 통일운동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이들이 오늘의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데에는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끊임없는 독재타도와 자유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몸을 불살랐던 선배 청년들과 민중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슬픈 사월을 되돌아보는 오월의 아침에 상념으로 가득한 것은 학생운동의 의미가 갈수록 희석되어 가기 때문이다.

김지원 대기자

논설주간, 시인,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낭송문화진흥위원

김지원 大記者 kjw558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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