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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의 人] 詩 인생 50년, 문효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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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의 人] 詩 인생 50년, 문효치 시인
  • 김지원 기자
  • 승인 2014.12.24 10: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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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한국문학의 현주소를 묻다”

▲ 문효치 시인 <사진=김지원 기자>
[KNS뉴스통신=김지원 기자] 12월의 한파를 예고하듯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날, 기자는 겨울 코트를 흠뻑 적시며, 운현궁 돌담길을 따라 시인의 집필실을 찾았다. 바쁜 시간을 뒤로 한 선생과 마주 앉았다.

시인에게 문학을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문단에서 50여년 세월 시력(詩歷)을 쌓은 선생은 평소의 주장처럼 문학론(文學論)은 다소 교과서적이면서도 분명하고 명쾌하다.

문학은 사상과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섬세한 예술

문학의 소재는 언어이며, 그 언어를 조합해 조직화하는 것이 문학의 본질을 결정짓는다. 즉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의지나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인 언어가 그대로 문학에 이용되는 것이다. 회화의 색·모양, 또는 음악의 음표와 달리 언어는 생활에 밀착해 있으므로 사회에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조형미술이나 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 광범위함을 지닌다. 감상의 표현만이 아니라 지식을 가르치고 사상을 전달하며 교훈을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일상어가 그대로 문학의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문학을 위한 언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사용하는 일상어를 정교하게 다듬고 독자적인 생명을 불어넣어 새롭게 조직할 때 비로소 문학 언어가 되는 것이다. 훌륭한 작가는 언어라는 소재를 마음대로 조작해 자기의 사상이나 감정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선생의 바쁜 일정을 굳이 축내지 않아도 인터넷에 수많은 자료들이 나온다. 그중 어느 시인이 진행한 인터뷰 내용 일부를 인용한다. 다시 질문을 해도 같은 내용일 것이기 때문이다.

▲ 선생의 집필실은 제자와 문인들에게 늘 개방되어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 문효치 시인, 문해·장충열 시인. <사진=김지원 기자>
서울신문, 한국일보 신춘문예 2관왕 청년 문효치

문효치 시인은 수없이 단련된 금결의 결단력이 풍겨 나온다. 결코 가볍지 않으면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것. 한국문협 이사장 출마로 바쁜 일정 때문에 거두절미하고 질문부터 던졌다.

선생은 한국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2관왕이다. 그것도 1966년 같은 해에 당선한 경사이다. 문학청년이면 누구나 꿈꾸는 신춘문예 관문을 두 번이나 통과한 일에 대해 ‘운’이 좋았 던 것 아니냐고 물었다.

1000대 1의 경쟁을 뚫고 최종심까지 올라오려면 실력과 함께 운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심사위원의 시관이 자신하고도 맞아야하는 측면에서 그렇다고도 한다. 언제나 죽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던 한 젊은이에게 보낸 신의 선물이 신춘문예 2관왕이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시인을 설명하려면 분단역사의 아픔을 통째로 짊어져야 했던 집안 내력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할아버지도 책을 출간할 정도로 선비였고 지역유지였으며, 부친 또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연희전문을 졸업한 인텔리에 시를 썼다. 하지만 6.25를 정점으로 집안이 몰락하는데, 아버지의 월북 사실을 몰랐던 시인의 젊은 날은 고스란히 가시밭길이었다. 연좌제가 있는 줄도 몰랐던 시인은 취직이 안 되고 늘 보안사나 경찰의 조사를 받아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시대의 아픔 앞에서 시인은 항변은 커녕 울분을 안으로 삼키는 수밖에 없어 건강은 극도로 나빠졌다. 당시 불안과 위기감, 초조 , 울분의 정신적 충격이 누적되어 화병이 깊어졌다고 한다. 34킬로그램의 청년은 아침에 나가면 무사히 돌아올 자신이 없어 죽음의 공포에 짓눌렸던 시기가 10년이나 지속되었다고 악몽의 세월을 회고 한다.

헤어날 수 없었던 청. 장년기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독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詩를 써야 했던 것. 쇼펜하우어를 읽고 노자를 읽으며 위로를 얻었던 시인의 첫 시집은 죽음을 주제로 한 시들이 많다.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려는 심리와 불안한 공포 심리를 노출해서 덜어보려는 마음, 허무주의에 빠진 시가 첫 시집에 수록되어있다.

그의 詩는 수백 번 흔들어 때릴 때 비로소 맺히는 그 물방울로 빚어낸 감란수(甘爛水)이다.
소설이나 수필보다 시는 이 땅에서 유독 사랑을 많이 받는다. 이유를 물었다.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작가가 유독 시인들이 사랑받는 한국 정서에 놀랐다는 평에 대해 어떤 생각인지 궁금했다. 시인 역시 긍정하는 설명을 덧붙인다. 수년 전 국제 펜 대회에서 일본시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일본시인들은 시집 500부를 발행한다고 했다. 그에 비해 한국은 1000부를 발행해서 그 시집이 누군가에게 전달되곤 하는 일을 보면 시를 읽는 독자가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 않느냐고 말한다.

‘사랑 받는다’는 개념의 배경에는 우리 민족이 무(武)보다 文을 숭상하였던 분위기가 있었고, 선비들의 기본 소양으로 시를 짓고 읊은 자연시인이었으며,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사회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무인(武人)들도 시를 짓고 읊었는데, 이순신장군, 남이장군 , 김종서, 이택도 전투 중이 아니면 막사에서 지필묵을 가까이 하고 시를 지었던 예를 상기시켜 준다. 이렇듯 시를 숭상하는 우리 문화가 예부터 전해왔다는 것이다.

시는 경제적 가치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현대사회에서 물질적 가치로 전도되어 시의 평가가 절하된 일을 시인은 안타까워한다. 다행한 일은 아직은 시의 애정이 남아있지만 앞으로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관심과 애정이 점점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간혹 시가 독자를 찾아서 내려가는 현상이나 인터넷에 올라있는 시의 형태에 대해 물었다.

시인은 시의 존재 이유를 말해주며 늘 의문을 갖고 있던 시가 무엇인지 규명을 원했던 그 숙제를 풀어준다. 시는 당연히 어려운 것이고 모든 예술의 최상위에 있기에 인기 시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본격적인 공부를 거치지 않고 떠오르는 느낌이나 감상을 인터넷에 적은 것은 시의 형태로만 적어놓았을 뿐이라고 한다. 대중적인 독자는 전문적인 시인의 시를 외면했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는 독자가 적었다.

시는 지식층이나 상류 교양 층이 문화적 유희로 즐길 수 있는, 독자가 많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하위예술과 중간예술의 정점에 시가 있기 때문에 모두를 끌어올리는 견인능력을 시가 담당하고 있다. 100명의 독자보다 1명의 독자가 100번 읽어주는 게 필요하다고 한다.

오히려 독자를 고급 예술로 유도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외국에는 예술 감상교육이 있다. 우리나라는 예술 교육의 부재로 인하여 발생하는 사회 문제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문화정책을 담당하는 당국에서는 ‘왜 국가에 의존하느냐, 시장에 나가서 경쟁하고 이겨라 ’하며 도리어 대중예술을 조장하며 책임을 떠넘기기만 하는 서글픈 현실을 말한다.

하지만 어떤 나라든 순수예술은 지원하고 육성해주고 있다. 과거에는 귀족들이 지원해주었는데, 지금은 민주화가 되어 정부에 아예 문화부에서 관리하는 재단위원회가 있어서 정책적으로 순수예술을 지원한다. 우리나라는 아주 미약하기만 하여 우리 문화예술에 대해 기갈이 있다. 사람은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가 균형을 이루어야 행복을 느낀다. 이러한 균형이 깨지면 불행을 느끼기에 사회와 국가에서 조정을 해주어야 하는데, 현대사회는 경제일변도로 편중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 詩歷 50년 문효치 시인은 신춘문예를 일간지 두 곳에 시로 당선하면서 문단에 등단 정갈한 인품과 해박한 실력으로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아왔다. <사진=김지원 기자>
간혹 왜 쉬운 시도 있는데 어려운 시만 공부를 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어렵게 느꼈던 시가 쉬워질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시 쓰기에서 창조성의 필요도 덧붙인다.

선생 역시 공부하는 독자는 성장한다고 말한다. 훈련되고 교육된 독자는 어려운 시도 매력을 느끼고 오히려 쉬운 시에 흥미를 잃어버린다고 한다. 아이들 퍼즐 맞추기를 볼 때도 그런 현상을 느낀다. 맞추기를 잘 해나갈수록 더 어려운 단계를 요구한다. 인간은 정신적 동물이어서 어려운 것에 부딪쳤을 때 의욕을 느낀다.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며 거시적으로 볼 때 어떤 문화권이나 문화예술은 발전 지향적으로 가고 있다. 시란 자기 진실을 표현하고 창조 역량을 발휘하며 존재하는 것이기에 너무 비평적 수요에 민감하지 말고 경향에 따라가지 말라는 충고를 한다. 산문시나 유행하는 시를 쓰면 되겠지만 일부가 전부는 아니지 않느냐고 묻는다. 물론 모든 시나 예술은 시대적 특성을 반영하는데, 치열한 경쟁적 시대, 삭막한 사회 등이 자연스럽게 문학에 반영이 된다. 그럼에도 6.25를 생각해보라.

구상시인은 초토의 시 라는 현실고발에서 휴머니즘을 찾았고, 사랑이나 그리움을 노래한 사도 쓴다. 극한 어려움에 놓여도 정서적 향수를 노래한다. 살벌한 시대를 쓰는 시도 있고 순수시도 있기에 다양성의 총화가 민족문학을 형성한다고 본다.

시인이 백제에 관한 시를 쓰는 이유가 있다. 공주 무령왕릉 발견 소식을 듣게 된 이후 유물전시를 우연히 서울에서 보았다. 목관의 재료를 보고 관에 대한 이미지가 문득 떠올랐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배의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장자리는 부식되었지만 옻칠이 그대로 남아있는 , 1500년 전의 나무가 썩지 않고 자신 앞에 있었던 것이다. 1500년 전으로 올라가고 다시 끌어오며 초월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로 소통이 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그 후 재미를 붙여서 유물 하나하나를 정복해가는 작업으로 백제시를 썼다.

유물에는 백제인의 삶의 형태가 배어져 있어 한국문학의 전통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그 방법의 하나로 백제시를 썼던 것이다. 백제는 외세를 업은 강한자의 침입에 의해 망한 국가이며 짓밟히고 인멸되었다. 힘에 의해 매몰되어 가려져 있고 연구 자료도 부족한 그 부분을 문학적 접근과 상상력을 활용하여 메꿔보는 것이다. 문화예술은 전통을 이어주는 통로이다. 마땅히 민족적 전통을 담아서 후대에 넘겨주는 게 예술이다. 시인의 시에 대한 자긍심과 애정은 남다르다.

詩를 위한 일이라면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을 것 같은 시인에게 깊은 감명을 받는다.

문효치 시인 (1943 7/15∼)

1966년 한국일보와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동국대학교, 고려대학교 대학원
시집- 무령왕의 나무새/ 왕인의 수염/남내리 엽서/계백의 칼/
칠지도/등 수상-시문학상 시예술상 천상병문학상/김삿갓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익재문학상 외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
강의-동국대/ 추계예대/ 동덕여대/ 대전대/ 주성대 등에서
문학 강의 현재 중국천진외대와 천진사대 객좌교수
국제펜클럽한국본부 32대 이사장 역임, 계간 미네르바 주간 『신년대』동인『진단시』
창립 동인/월간 [문학과 창작] 주간.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장.

詩歷 50년 문효치 시인은 신춘문예를 일간지 두 곳에 시로 당선하면서 문단에 등단 정갈한 인품과 해박한 실력으로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아왔다.

수많은 저서 및 시집, 산문집 출간, 대학을 비롯한 문학단체에서 강의하며, 문학도들을 양성했다.

선생은 어떤 일이든지 소신을 갖고 최선을 다할 뿐 아니라 언행일치가 확실한 인물로 평가 받으며,후학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큰 문학상과 훈장을 수상했다.

글쓴이=김지원 大記者 / 시인,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홍보위원

무령왕의 나무새 / 문효치

머리로, 가슴으로
날아드는 새.
이승의 슬픔 끝에서
저승의 벼랑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이.
떨어져 방황하는
떨리는 영혼을 모셔 안고
하염없이 날아서
여기 실어 오느니.
이제 피곤한 날개를 접고
부활의 몸짓으로 서성이는
영혼을 위해 노래하느니.
저승의 어느 산골
그 깊은 숲
소나무 잎새 끝에서 생겨나는
피리를 부느니.
마땅히 흘러
우리의 어린 자식들
그 자식들의 먼 먼 후손의
귀에까지 멍멍히 젖어들게 하느니.
마당으로, 방으로 날아드는 새,
그러다가
바스라져 가느니.

「신년대」 동인 ‘진단시’ 창립 동인/월간 [문학과 창작] 주간.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장

 

김지원 기자 kjw558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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