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13:24 (금)
전주교구의 제2성지, 여산 천주교…여산 숲정이와 백지사지터
상태바
전주교구의 제2성지, 여산 천주교…여산 숲정이와 백지사지터
  • 최영민 기자
  • 승인 2014.06.29 22: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순교성지 숲정이는 전라북도기념물 125호 지정되어 있다.
[KNS뉴스통신=최영민 기자] 전북 익산시 여산면 두여리에 위치한 여산(礪山)은 천주교 전래가 다름 지역보다 앞섰고 또한 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 길었다.

여산은 병인년(1866년)의 연속인 무진박해(1868년) 당시 여산군의 속읍지였던 고산, 금산, 진산 등의 심산유곡에 숨어 살다 이곳 여산 관아로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격다가 감옥과 형장인 숲정이와 장터, 백지사지터에서 처형된 순교성지이다.

충청도와 전라도, 즉 충남과 전북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 여산 땅을 학문과 행정이 중심지를 이루어 천주교 전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앞섰다.

▲ 숲정이 성지 예수상
일찍 복음을 전해 받은 반면 박해가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 길었던 탓으로 일정한 형장이 없이 마구 처형이 자행된 비극의 형장이기도 하다.

병인박해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신자들을 혹독한 박해의 칼날아래 내몰았다. 오늘 날에는 작은 시골마을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부사(府)使)와 진영(鎭營)이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을 마구잡이로 처형시킬 수 있는 사법권을 행사 할 수 있었다.

[치명일기]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2명에 이르는데 그중 17명이 지금은 대아리 저수지로 인해 잠겨버린 널바위(전북 완주군 동상면 광암리)사람들 이였고 김성첨(토마스)은 조카 김명언을 비롯해 정규, 정언 등 3형제와 그 아들 등 3대에 걸친 6명을 포함한 마을사람 17명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였다고 한다. 여산은 특히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가혹한 처형방법으로 유명하다.

여산동헌에 잡혀 온 신자들은 참수, 교수는 물론,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죽임을 당했다.

여산이 품고 있는 성지는 동헌과 옥터, 여산 숲정이와 배다리, 장터, 뒷말 치명터 등 곳곳에 널려 있어 어찌 보면 여산 전체가 하나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 순교의 특징은 공동체적 성격이라는 점이다. 잡혀 온 교우들은 옥중에서도 항상 쉬지 않고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면서 서로를 격려하며, 무수한 고문과 매질의 고통과 굶주림을 견디어 내다 마침내 차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특히 여산에서는 백지사형으로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백지사형은 죄인의 손을 뒤로 포박하고 머리를 풀어 손에 함께 묶어 얼굴을 하늘을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뿌리면서 한지를 한 장 한 장 붙여 숨을 쉬지 못하게 하여 죽게 만든 형벌이다. 종이를 붙여서 죽였다 해서 도모지사라고 하기도 하는데 도모지사라는 말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 여산에서는 백지사형으로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백지사형이 행해지던 동헌은 부사가 당시 사법권을 비롯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고을을 다스리던 곳으로 지금은 일부가 경로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부사가 업무를 보던 곳만이 보존되어 있다.

이 동헌 자리 주위에는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고목들이 남아 있어 유적을 돋보이게 한다. 특히 동헌 마당에는 옛 부사들의 선정비(善)政나碑)나 공덕비(功)德들碑)들과 함께 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가 서 있다.

여산 동헌은 현재 전라북도기념물 제93호로 지정돼있고 맞은편 여산초등학교 주차장으로 변해 버린 여산 옥터는 옥에 갇혀있던 신자들이 굶주림에 못 이겨 옷 속에 있는 솜을 뽑아 먹다가 처형지로 끌려 나오자 정신없이 풀을 뜯어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최영민 기자 cym5375@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기기사
섹션별 최신기사
HOT 연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