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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환 법무사] 어느 조합장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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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환 법무사] 어느 조합장의 죽음
  • 이부환 법무사
  • 승인 2014.06.27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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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인법무사합동사무소 대표 법무사
정비사업 현장에 몸을 담은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사건이 있다. 어느 조합장의 죽음이다.

2006년쯤 한 정비사업조합(이하 조합)을 방문했을 때 조합장은 훤칠한 키에 상당히 논리적이며 어딘지 모르게 카리스마가 풍기는 그런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여러 번 조합을 방문했고 법적인 실무에 대해 조언도 하고 약간의 인간적인 대화도 나눴지만 정작 법무사 용역은 낙하산 인사 식의 업체가 내려와 입찰에 참가해 보지도 못한 채 물을 먹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어느 날, 이 조합장이 전화로 “한 번 볼 수 없겠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만남을 요청했다. 사실 잊고 싶었던 조합이었기에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간절한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해 시간을 내 동네 커피숍에서 만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완전 딴사람이 되어 있었는데, 과거 패기에 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뇌졸중으로 휠체어에 탄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 사연을 들어 본 즉 이러했다. 토지등소유자가 1000명이 넘는 뉴타운·재개발 현장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조합설립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 승인을 받았고 사무실도 번듯하게 마련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어느 날 구청으로부터 추진위원장의 법적 지위에 문제가 있음을 통보받았고, 반대파들의 방해에 밀려 추진위 사무실마저 점거당했다는 것이다.

이에 평소 친분이 있던 국회의원의 소개로 어느 브로커로부터 철거업체 A를 소개받았고, 조합 설립 후 철거업자로 선정해주겠다는 약속을 한 뒤 변호사 비용과 경비 등으로 3300만원을 지원받았다.

하지만 이후 철거업자 선정 시 여러 사정으로 A가 아닌 B라는 업체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에 하는 수 없이 A측 관계자를 불러 약속을 지키지 못한 조합의 부득이한 사정을 설명하고 원금과 이자를 돌려주겠다고 사정을 하였다. 그러자 A측은 원금 3300만원이 아닌 2억3000만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깜짝 놀란 조합장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소개한 브로커가 조합장을 매개로 나머지 돈 1억8700만원을 중간에서 가로챈 것이다.

그래서 너무 황당한 나머지 삼자대면을 하자고 하여 셋이서 만나 돈의 사용처를 확인하게 되었는데, 이 브로커는 얼굴색 한 번 변하지 않고 아주 당당하게 2억3000만원 전액을 조합장에게 돈과 선물로 건넸다며 오히려 조합장더러 양심이 없다고 몰아세웠다고 한다. 심지어 철거업자 선정이 안 되었으면 당연히 돈을 되돌려주어야 되지 않느냐며 훈계까지 하였다고 한다.

결국 조합장은 사태가 불리해짐을 깨닫고 조합의 철거업체로 선정된 B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B는 추진위가 조합 설립을 준비할 무렵 갑자기 나타나 선물 공세와 룸살롱 접대 등을 통해 임원들의 환심을 샀고, 조합 설립 과정의 모든 어려운 문제를 알아서 척척 해 줄 것처럼 호언장담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임원들은 이 업체에게 모든 업무를 위임하다시피 했고, 실제 조합 설립 후 B는 시공자를 비롯하여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 설계자 등 협력 업체 선정에 모두 관여하였다. 또 철거 용역비도 100억원 이상 계약되어 시공자가 선정되자마자 계약금으로 수십억원이 지급되었다. 이 때문에 조합장은 자기를 떠받드는 이 철거업체의 C회장이 항상 옆에서 자신을 든든하게 지켜 주고 있고, 전에 A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있다고 여러 번 말한 적이 있어 당연히 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C회장은 어찌된 일인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해결은커녕 시간만 흘려보냈고, 다급해진 조합장은 시공자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으나 한결같이 C회장이 알아서 정리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태평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중 A는 원금과 이자를 갚겠다는 약속 기한이 지났으므로 어쩔 수 없다며 경찰에 진정서를 접수시켰다.

조합장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그가 추진위 때 수억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경찰에서는 선정된 시공자ㆍ철거업자와 조합 임원과의 유착 관계를 수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조합장은 경찰에 불려 다니며 곤욕을 치르면서 불면에 시달렸고, 어느 날 갑자기 조합 사무실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지기에 이르렀다. 조합장은 병원에 입원하여 휠체어에 탄 채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고, A로부터 받은 돈은 2억3000만원이 아닌 3300만원이며 이 돈 역시 자기 호주머니에 들어온 사실이 없고 전액 추진위의 변호사 비용과 다른 용역비 등으로 지출되었음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돈을 전달했다는 브로커가 한술 더 떠 조합장에게 돈을 건넸다는 일기장의 메모까지 가져와 경찰에 제출하면서 조합장을 파렴치범으로 몰아세운 것이다. 어쩔 도리가 없어 꼼짝없이 덫에 걸려들었고, 검찰에 사건이 송치되어 검사 앞에서 억울하다며 아무리 하소연한들 돈을 전달했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뒤엎을 방법이 없었다. 검찰은 목격자의 진술을 공소 유지의 유일한 증거로 내세워 조합장을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배임수재 혐의로 기소하였다. 당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는 추진위원장을 공무원으로 의제하여 뇌물수수죄로 처벌하는 규정이 없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합장은 도리 없이 조합장 직의 사표를 스스로 제출했다. 두 달 후 재판이 시작되었고, 법정에서 A는 브로커를 통해 2억3000만원의 돈이 조합장에게 전달되었다는 변함없는 주장을 하였고, 브로커는 증인으로 출석하여 조합장이 양심도 없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이때 필자는 조합장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이처럼 그간의 억울함에 대해 자초지종과 하소연을 듣게 되었다. 필자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2000페이지가 넘는 수사 기록을 넘겨받아 며칠을 검토한 끝에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하였다. 브로커는 조합장에게 건네줄 5000만원으로 다단계회사로부터 화장품 100세트를 구입하여 조합장에게 박스째 가져다주었다고 했는데 이 화장품의 행방이 묘연했으며, 브로커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사람을 모아 달라고 해서 조합원 수십 명을 동원하여 강원도에 다녀왔는데 그 비용을 조합장의 부탁을 받아 지출하였다는 게 일반인의 상식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조합장은 즉각 변론 재개 신청을 하여 브로커의 위증 가능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여 그때부터 재판은 무려 10개월 넘게 공방을 벌였고, 애초 조합장의 유죄를 예단했던 판사도 무죄의 심증을 갖게 되어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담당 판사는 미국 유학을 떠났으며 새로 부임한 후임 판사에게 공이 넘겨졌다. 후임 판사는 변론 한 번 만에 브로커의 증언을 듣고 바로 선고 기일을 잡아 조합장에게 징역형과 함께 집행유예를 선고하였다. 물론 그 판사는 유죄의 확신이 없었기에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으로 보인다.

조합장은 크게 낙담하였고, 두문불출한 채 깊은 상처의 수렁에 빠졌다. 그나마 조합원으로서 가지고 있던 집도 이 사건으로 이미 A가 가압류한 상태에서 형사판결로 경매에 넘어갈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또 조합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울 부근 어느 재건축 조합장이 C회장의 말을 믿고 철거업체를 바꾸었는데, 결국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너무도 충격적이었지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기에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그해 추석 무렵 필자에게 전화 한 통 걸려 왔는데 조합장의 가족이었다. 추석 전날 필자에게 신세만 지고 빚을 갚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가족에게 남기고 화장실에서 극한 선택을 하였다는 것이다. 조합장의 변론을 맡았던 변호사가 1심 판결을 했던 판사에게 그의 자살 소식을 알리자 판사는 고개를 떨구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이 조합장의 죽음은 정비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많은 교훈을 남겼다. 특히 법을 집행하는 검찰과 법원은 조합 임원의 부정에 대해서는 항상 부정적이며 쉽게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러기에 조합의 형사사건은 자칫하면 모두가 도매금으로 넘어가 억울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부환 법무사 pjp7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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