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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상상력, 살아 있는 자동차 기사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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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상상력, 살아 있는 자동차 기사의 조건
  • 한명륜 기자
  • 승인 2013.11.12 12: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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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원표가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는다

[KNS뉴스통신=한명륜 기자] “악기의 사운드는 그 제원표와의 일대일 대응이 아니다.”

지난 10월 말 경, 활동 20주년 기념 앨범을 낸 기타리스트 이현석과의 대화에서 나온 이야기다. 예컨대 ‘마호가니’라 하더라도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고음역대 배음을 많이 가져 밝고 명료한 톤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고, 밝은 톤의 대명사로 알려진 ‘앨더’ 바디라 하더라도 반대의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

요즘 ‘스펙’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입사를 위한 자격요건으로 굳어져가는 추세지만, 원래 이것은 제원표라는 뜻의 ‘specification’ 약칭이다. 거의 모든 공산품에는 제원표가 있다. 실물을 보지 않았을 때 이 자료는 어떤 제품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인 것은 분명하다.

단신과 기획을 포함한 언론 기사에서 제원표의 영향력이 가장 많이 포함되는 분야가 바로 자동차 기사가 아닐까. 복잡한 부품들의 합을 통해 인간의 맨몸으로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내는 이 기계들을 설명하는 데 제원표는 중요한 사실이다. 한데 이 제원표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면?

차량의 하체를 형성하는 현가장치, 즉 서스펜션 부품에 대한 기술(記述)이 대표적이다. 현대차 거의 대부분의 차량 제원표에서 후륜 부분을 차지하는 ‘멀티링크-코일스프링’ 서스펜션은 별도의 충격 흡수장치를 필요로 할 만큼 단단하다. 그만큼 고속에서 노면에 대해 긴장감 있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현대차에서도 고속주행 성능을 강조하고자 만들어진 K5, 쏘나타의 최근 모델은 이 감각을 비교적 충실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서스펜션을 사용했더라도 싼타페, 그리고 과거 베라크루즈 등은 사정이 다르다. 고속주행에서 차선 변경이나 추월 시 피트니스의 메디슨볼 위에 있는 것처럼 운전자가 쏠림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썰렁하리만치 간단하다. ‘다른’ 차이기 때문이다. 이전 모델이 지닌 역사가 다르고, 최초 개발된 목적이 개별적이며, 그 차량이 한 제조사에서 갖는 위상, 그리고 그 제조사가 현재 상황을 바탕으로 향후 시장에서 이루려는 목표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수입차나 신차라 해도 마찬가지다. 수입차라면 한국차보다 통상 더 길게 마련이 모델의 역사상 흐름과 세계 산업 동향 위에서 형성된 존재감에 의해 정체성이 부여될 것이다. 신차는 인접한 형제나 사촌 격 모델들의 속성과 비교를 통해 그 아이덴티티가 제시된다.

이러한 ‘문맥’을 제원표와 연결시키는 것은 다름아닌 상상력의 소관이다. 언뜻 저널리즘에서는 위험한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말하는 상상력이라면 물론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상상력이란 제원표라는 지극히 개별적인 요소를 산업 안에서의 흐름이라는 맥락에 유효적절하게 놓아보고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느냐의 여부다.

이 상상력이 없는 기사들은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다. 포털에 연속해서 뜨는 기사들은 거의 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배기량이 얼마며, 토크가 몇 kg․m이며 누가 디자인했다는 등등. 한국의 자동차 산업, 특히 신차 개발에서 같은 프레임에 이름과 디자인만 바꾸기, 구분 안 되는 형제 차종 동시 발매로 ‘집안 손해’가 나는 데는 이런 상상력 없는 ‘제원표 일대일대응’식의 자동차 기사 탓도 배제할 수는 없지 않을까. 지난 11일, 최근 현대차의 기술적 문제에 관해 책임을 지고 이사진들이 물러났다. 자동차 기사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책임까지는 못 지더라도 반성의 여지는 없나 싶었다.

한명륜 기자 trashfairy@kn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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