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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5∙18광주민중항쟁 40주년에 부쳐 - "5•18, 광주는 섬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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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5∙18광주민중항쟁 40주년에 부쳐 - "5•18, 광주는 섬 이었다"
  • 이정성 기자
  • 승인 2020.05.22 14: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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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전역 진입로 봉쇄… 5월 21일부터 시외전화 차단

 

[KNS뉴스통신=이정성 기자] 광주는 시가지 중심에서 남동쪽에 자리한 무등산(1187m) 아래 분지형의 도시로서 나주(남쪽), 화순(남동쪽), 함평(서쪽), 장성(북쪽), 담양(북동쪽)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으면 섬이 된다.

 섬은 유배자의 땅이었다. 섬사람들은 파도보다 바람을 무서워한다. 80년 5월 광주는 피바람으로 낭자한 섬이 되었다. 제 나라 백성을 보듬고 지켜줘야 할 군대가 무지막지 뛰어들어서 양민에게 미친 망나니의 총칼질을 해댔다. 포악한 내란계엄군은 사전공작 된 집단학살 ∙방화∙강간을 실행에 옮겼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전두환 일당의 내란신군부는 광주민중을 폭도∙용공분자에 의해 장악된 무법천지의 무정부상태로 묘사하고 이를 통제∙ 협박∙ 회유에 걸려든 제도권 언론은 내란계엄사가 주는 보도지침을 온 나라에 전단으로 뿌렸다. 인간성의 이성과 감정의 한계를 논하는 것은 광분한 내란계엄군 앞에서는 사치스러운 공허였다. 광주는 폭동의 섬으로 왜곡했다. 내란계엄군의 처참한 집단광기의 피바람은 광주시민의 생명본능마저 말살했다. 전두환의 정권 찬탈 목적에는 모든 이성적 사고와 행위는 한 줌의 지푸라기였다.

섬사람은 제 땀 흘려 벌어먹지 남의 구럭 넘보지 않는다. 나라에다 옷 달라고, 집 내놔라 해본 적도 없고 맥없고 빽 없는 놈 무단히 죽이려드는데 섬사람들은 꼿꼿이 대들어섰다. 어린학생들이 뭔 죄로 총을 맞고, 공장 다니고, 구두닦이 하고,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 하고, 길바닥에 뒹굴어 다니는 쓰레기 치워서 먹고사는 넝마주이가 나라에 진 죄가 뭐 있다고 대검으로 찌르고 베고, 비무장 섬사람에게 난사하는 군대는 인간의 극단의 야만성을 끝없이 확장했다. 남녀노유를 가리지 않는 식인귀였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섬사람은 너나없이 뭉쳐서 항거할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 자위권으로 무기를 들어야했고 올곧은 인간성을 세우는 여지없는 투쟁이었다. 섬사람은 신군부의 배반∙반역∙찬탈을 위한 폭력에 분기탱천(憤氣撑天)은 당연한 대항이었다. 섬사람의 순결한 의지 표현은 혈안의 전두환 일당의 내란계엄군에게는 한 낱 철모르는 아기의 몸짓에 불과했다.

광주로 통하는 길목은 5월 18일 오후부터 막았고, 21일에는 아예 외부와 통신(시외전화선)도 끊겼다. 반란군은 치밀한 도륙계획표대로 음험한 공작을 자행했다. 그들은 21일 오후 1시경 전남도청에서 방송하는 애국가를 신호로 도청광장을 메운 시민들에게 집단사살을 감행했다. 내란계엄군은 대자대비(大慈大悲) 부처님 오신 날(사월초파일)에 대한민국 국가를 배경음악 삼아 앉아쏴 자세로 시민을 향해 M16을 무자비하게 갈겼다.

나는 다음날도 전남대 병원으로 갔다. 병원 영안실에 안치 못한 시신들은 난장에 널브러져 있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현장에는 쉬파리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시신을 핥고 있었다. 시신은 5월 하순 더위에 빠르게 부패해갔다. 라플레시아 꽃냄새가 진동했으나 신분확인을 서둘렀다. 그러나 척살 당하고 사살 당한 이들의 신분증이나 소지품을 찾으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면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거의 기층민이고 무연고자들로 보였다. 신분증은커녕 동전 한 닢도 나오지 않았다. 신분을 알 수 없는 시신 20여 구의 인상착의를 적바림해서 전일방송국으로 달려갔다. 도청광장으로 퍼붓는 방송국 옥외 스피커로 사망자를 찾아가라는 방송을 했다. 방송실에서 선무공작원(내란계엄군 편의대원)으로 보이는 이와 맞닥뜨렸다.(당시에는 고정간첩으로 의심했다) 그는 후줄근한 흰 광목 한복에 밀짚모자와 흰 고무신 차림이 위장한 농부로 보였다. 그는 “공수부대 군인들이 용전 뒤에 있는 병풍산으로 동네 청년 30여 명을 끌고 갔는데 죽였을 것이다.” 라고 했다. 나는 그 이에게 확인 안 된 것을 방송해서 시민들을 격분시키면 곤란하다고 판단하고 내 방송이 끝나면 다시 얘기하자며 옆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방송을 마치고나서 보니 그는 없어졌다.

사망자 165, 부상 후 사망자 376, 행불자 76, 부상자 3,139

군인 23, 경찰 4, 군경부상자 253 (1980. 5. 27 정부발표)

 광주민중은 정부에서 발표한 통계를 믿지 않는다. 믿을 필요도 없다. 그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할 군대가 백성의 터럭 한 올이라도 무단히 건들었다면 자체가 국가폭력이다. 군대가 제 나라 백성을 죽였다면 사망자수에 의미를 두면 국가폭력의 주체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이다. 한 명이나 만 명이나 책임의 무게는 달라질 수 없다. 사상자 숫자는 또 다른 기만행위다. 정부가 발표한 사망자 경찰 네 명은 내가 직접 시신을 확인했다. 도청광장에서 시민군 버스에 치여 불상사를 당한 함평경찰서 소속 전투경찰대원들로 전남대 병원에 태극기에 덮여 있었다.

정부가 발표한 행방불명자 확인에 집중해야 한다. 생사는 알아내야하기 때문이다.

5∙18민중항쟁이 끝나고 무등갱생원(원장 박금현, 54년 제2회 마닐라 아시아경기대회 한국대표 복싱 금메달 획득)이 문을 닫았다. 500여 명이 넘은 넝마주이 갱생원이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갱생원 원장이 지인에게 한 말을 직접 들었다.

“오월의 진상을 파낸 작업에 몰두한 강상우 감독의 다큐영화<김군>에서 극우망언인사 지만원이 “이거는 틀림없이 북한군이다.”라고 ‘북한특수군제1광수’로 지목한 이를 광주 동구 서석동에서 세탁소를 하는 주옥(61)씨가 2015년 5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걸린 사진 속에서 ‘김군’을 알아냈다. 그 당시 아버지(주대채,87)가 학동에서 ‘왕대포시음장’이란 가게를 했는데 그 집 단골손님이었다고 확인해줬다. ‘김군’의 이름은 여전히 묻힌 채, 성씨만으로 복권된 오월 시민군. 그는 오월에 스러져간 무명의, 익명의 시민군을 대변한다. 역사의 결정적 순간에 분연히 주체로 나섰으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죽어간 이들을 떠올린다. 그 수많은‘개인’들의 얼굴과 생과 사를 묻게 한다.

‘김군’은 1980년5월24일 송암동에서 계엄군에게 사살 당했다. 그러므로 긴 세월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었다는 처연한 사실은 ‘김군’의 최후를 목격한 또 다른 시민군 최진수씨의 증언으로 영화 속에서 밝혀진다.”(전라도닷컴2020.5월호P.28에서 발췌)

살레시오 교정에 있는 윤상원 열사의 상

5∙18민중항쟁의 상징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윤상원을 기억하라

전두환 신군부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계엄사 합동수사단이 광주민주인사들을 예비검속으로 체포구금하자 광주의 민주화운동가의 제1선이 무너져서 5∙18광주민중항쟁의 지도부 구성이 난망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난세에 새 영웅이 등장했다. 광주광천동공단에서 노동운동에 진력하던 한 무리의 ‘들불야학’이 그들이며 그 곳의 지도자가 윤상원이다.

윤상원은 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에서 평범한 농촌 가정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1950. 9. 30.) 임곡초. 광주 북중학교를 거쳐 살레시오고교졸업, 1971년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박정희 유신독재 정치권력에 투쟁하는 선배(김상윤, 사회운동가, 민청학련사건 관련 옥고 치름, 녹두서점 주인, 윤상원기념사업회 창립 이사장)를 만나 역사, 철학 등에 관한 독서와 토론, 사색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개혁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대학 졸업을 앞둔 1978. 1. 주택은행에 입사 후 6개월 만에 사직하고 광주 광천공단의 한남플라스틱 공장에 취업하여 노동운동과 미취학 노동자를 위한 들불야학의 강학을 했다.

윤상원의 아버지 윤석동 옹은 “언젠가 나와 아들놈은 꽤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오. 나는 녀석이 억압받고 착취당한 사람들에 대한 너무 깊은 동정심을 갖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소. '돈을 많이 벌어서 도와주면 되지 않겠냐?' 아들이 대답합디다. '제가 돈을 벌어 도대체 몇 사람이나 도울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다'라고 말이요. 수도 없이 말싸움을 해봤지만, 한 번도 아들놈을 이겨보지 못했소.”라고 회고했다.

브레들리 마틴 기자(‘볼티모어 선’ The Baltimore Sun ; 미국 메릴랜드주 내 최대의 발행 부수를 기록하고 있는 일간 신문)는 윤상원이 5월26일 죽기 하루 전에 가진 외신기자회견에 본 인상을 말한다.

"나는 광주의 도청 기자회견실 응접탁자 바로 건너편에 앉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 그의 두 눈이 나를 향해 다가오자 나는 스스로도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그의 눈길은 부드러웠으나 운명에 대한 체념과 결단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거의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스물다섯 살 정도에 광대뼈가 나온 지적인 모습이었다.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은 그의 눈길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윤상원기념사업회 이태복 이사장(김대중 정부의 보건복지가족부 장관 지냄)은 "노동자의 전민노련·대학생의 전민학련 연대(학림) 전국 조직을 구성하고 있었던 1978년 광주 동구 계림동 녹두서점에서 윤 동지를 처음 만났다. 당시 은행원을 그만두고 노동운동에 뛰어든 그의 신념과 삶의 태도를 보고 광주·전남 조직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상원이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말도 없이 곧바로 수락했다. 윤상원 동지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 내려는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윤 동지는 전남대학교를 졸업한 후 주택은행에 입사해 평탄한 생활이 보장됐었다.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 곁에 다가가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겠다고 퇴사했다. 그는 조용하고 착실하며 공부만 하는 샌님이 아니라 자기주장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80년 봄,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화 투쟁을 이끌어 내기 위해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 후 1980년 5월 계엄군이 광주를 봉쇄하기 직전까지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투쟁 방향 등을 논의했다. 그는 광주전남권의 재야운동 핵심으로 나섰다."라고 되새겼다.

윤상원은 5.18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자 들불야학 동지들과 함께 시민군으로 참여하여 투사회보 제작 배포, 도청 앞 시민궐기대회를 주도하고 시민수습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윤상원은 시민군 대변인으로서 당시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키다 27일 새벽 계엄군의 무력에 의해 사망했다. 향년 30세.‘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2월 20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올린 5.18 광주민중항쟁 시민군 대변인으로서 활동하다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의해 사망한 윤상원과 광주 광천동공업단지의 미취학 노동자를 위해 만든 ‘들불야학’에서 강학으로서 기둥 역할을 한 노동운동가 박기순 의 영혼결혼식의 넋풀이로 헌정된 노래다.

황석영(1943∼ 소설가. 사회운동가)이 백기완(1932∼ 저술가. 사회운동가)의 장편 시 ‘묏 비나리’에서 발췌해서 재구성하여 김종률(1958∼ 가수 겸 작곡가. 세종시문화재단 이사장)이 곡을 썼다.

‘묏 비나리’는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우리 말 쓰기에도 큰 관심을 지닌 백기완은 시국 사건인 서울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잡혀가 80년 12월 옥중에서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앞장서 나아가라’는 -한국 청년 민주민중운동가에게- 당부하는 절창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묏 비나리

      -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5∙18광주민중항쟁 진실 규명과 화해를 위하여

1945년8월15일 해방 후 미군정과 1950년 한국전쟁까지 양민학살사건을 보면 미군정 때 최초로 발생한 남원(1945)을 시작으로 제주(1947), 여순(1948), 화순(1949), 문경(1949), 노근리(1950), 보도연맹(1950),순창(1950), 강화(1951), 산청∙함양(1951), 거창(1951)에서 희생자가 6∙25전쟁 남한 전사자(26만 명)보다 많다. 반공∙부패∙독재∙숭미주의자崇美主義者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합작품이다. 2020년 현재 27만여 명의 원혼은 중음신으로 고향산천을 떠돌고 있다. 양민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은 전무상태다.

한국에서 발생한 양민학살 사건은 미국이 주도하거나 반공∙부패∙독재∙숭미정권을 도발시킨 당사자이므로 자주권을 상실한 해당 정권은 진실규명을 할 수 없다.

미국은 이승만이 학생혁명으로 몰락하고 민간정부의 내분을 빌미삼아 군사쿠데타로 찬탈한 박정희 독재정권을 지지∙조정하다, 국익우선 자본주의의 자국 이익에 반하면 일모불발一毛不拔의 나라답게 이승만 정부를 뒤엎듯 부패한 박정희독재정권도 내쳤다.

미국이 보면 한국은 지정학적 군사요충지에 반공∙부패∙독재∙군부정권은 군비산업자의 공깃돌 노리개 감이다. 전두환의 숙주는 박정희다. 박정희와 DNA까지 같은 전두환 신군부(하나회 중심)에게 정권을 맡기는 것이 순리라고 믿고 말고도 없다.

백성은 1979년10월 정변으로 18년 박정희독재정권에서 해방되는 희망을 보았지만 미국의 심중은 헤아리지도 안했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성령의 은총을 가져다 그냥 주는 고마운 나라니까. 일본 식민생활 36년 해봤는데 할 만하데 하는 백성이 아닌 국민은 미제가 어때서? 탱큐 지.

미국이 양김(김대중,김영삼)을 분열시키는 것은 케이크 한 조각 먹기다. 미국은 위대했다. 양김 보다 공깃돌 전두환을 선택하고 우리 백성에게는 열패감을 줬다. 양김의 분열은 전두환을 넘어 노태우까지 이어졌다. 진보진영은 분열로 망했다. 허망해서 ‘봄날은 간다’를 목 터져라 불렀다.

5∙18광주민중항쟁 40주년이다. 미국(전권대사 글라이스틴과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전두환 신군부의 계엄군 공수특전단을 광주민중항쟁에 투입하는데 미국 지휘권과 관계없이 한국의 독자적 작전지휘권을 승인한 사실을 전두환이 사망하기 전에 명백히 규명해줘야 한다. 우리는 미국에게 과제를 줬다. 미국의 지능에 따라 과제물 제출 시간이 정해질 것이다.

5∙18광주민중항쟁을 폄훼하는 몰지각을 제거하기 위하여 철저한 진실 규명을 해야 한다. 유대인 학살 장소 독일의 다하우(Dach며)수용소 기념관 입구 현판의 “과거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게 되어 있다(Those who forget the post are doomed to repeat it)”라는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ge Satayana)의 명구를 떠올린다.

2018년3월13일 제정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9월 14일 시행된 이 법은 진상규명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최장 3년 동안 518 당시 국가권력의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암매장 사건 등에 대해 조사하게 돼 있고, ‘조사위원 9명은 국회가 추천하고 대통령이 임명 한다’로 돼 있는데 자유한국당의 자격논란이 있는 진상규명 조사위원 추천 문제로 1년여 동안 지체되다 2019년 10월 31일 개정안이 통과되어, 2020년 1월에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진상조사위)가 광주를 방문해 공식출범을 시작했으나, 조사기간(최장 3년)과 조사요원(35명) 인력충원 문제가 다시 대두 됐다. 실체규명이 어려운 조건이다. 국회에서 재개정할 수 있는 여건이 4∙16총선에서 만들어졌으므로 문재인 정부의 의지의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이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사에서 제시한 “발포 명령자 규명과 계엄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헬기사격의 진실과 은폐조작의혹과 같은 국가 폭력의 진상은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와 “이제라도 용기 내 진실을 고백한다면 용서와 화해의 길이 열릴 것이다.”라고 한 말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로 연결 된다.

“만델라는 인간의 평등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전체 아프리카 와 세계의 민중을 위해 온 생애를 바쳤다. 그는 소수의 백인들이 약350년에 걸쳐 대다수의 아프리카 민중을 노예처럼 다루며 억압하고 살육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짓밟히는가를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 파괴는 억압받는 흑인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탄압하는 백인들의 영혼도 똑같이 파괴되고 타락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7년간의 감옥생활, 연금, 반역죄 재판, 사형선고, 망명생활, 이별한 가족 등 고난의 생애에서 고통을 통해 몸소 깨달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일깨워 주고 있다. 그는 또한 화해와 관용의 정신을 말하고 있다. 그는 오랜 핍박을 받고도 자신과 그이 가족과 동지를 박해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해했다. 그리하여 남아프리카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평화를 가져왔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다. 만델라는 우리 시대가 낳은 최고의 용기의 표상이다.”<김대중 전 대통령의 ‘만델라 자서전’독후감에서>

5∙18진상조사위는 조사기간의 무기한 조사대상자 무제한 원칙으로 진실은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진실을 고백한 모든 이에게 관용을 베풀어 용서 하고 만백성의 화해의 길로 나아가길 바란다.

끊어진 사람들 사이를 잇고 지난 어려움을 떨쳐내는 곳. 빛고을 “그 섬에 가고 싶다”.

이정성 기자 romualdojs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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