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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키신저 질서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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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키신저 질서의 붕괴
  • 강병환 논설위원
  • 승인 2019.09.12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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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환 논설위원(정치학 박사)
강병환 논설위원
강병환 논설위원

동아시아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이 지역은 과거 40년 동안 전례가 없을 정도로 성장과 번영을 이루었다. 오직 북한만이 예외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키신저 질서(Kissinger Order)가 작동하고 있었다. 이 질서는 베트남전의 종결과 중국과 미국의 화해에 기반을 둔 것이다.

40여 년 전 우울한 현실주의자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Henry Kissinger)는 소련 견제와 베트남전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연중제소(聯中制蘇)를 채택했다. 중국과의 화해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화해는 혼자서는 못한다. 중국은 화해의 전제조건으로 대만과의 단교, 철군, 폐약(대만과의 방위조약 폐기)를 요구했고, 미국은 이를 충실히 이행했다.

1971년 장제스(蔣介石)의 중화민국은 유엔 상임이사국 자리에서 쫓겨나고 중국대륙이 그 자리를 차지 했으며, 미국은 아예 대만의 국가적 지위를 포기시키고 중국으로 달려갔다. 한반도에도 봄바람이 불어와 7·4 남북공동성명도 나왔으나 미완에 거쳤다. 일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972년 중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한국전에서 만났던 어제의 적들이 이념보다는 실리를 선택한 것이다.

물론 키신저 뒤에는 닉슨 대통령이 있었다. 비록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실각한 인물이지만, 상당한 전략적 안목을 지닌 사람임은 분명했다. 닉슨과 키신저가 연꽃을 들어 보이자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미소로 답하면서 형성된 미국이 짜놓은 질서가 곧 키신저 질서다. 이로써 중미 양국은 소련이 붕괴하기 전까지 준동맹 상태를 유지했으며, 냉전이 와해 된 이후에도 협력과 경쟁이 공존하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시기를 겪으면서 30년이 흘렀다.

이 기간에 아시아 나라는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복지의 증진을 이루어 냈다. 미국은 주도적인 지위를 이용해서 충돌을 억제하고, 안정적인 안보환경을 만들었으며, 시장개방을 촉진하고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질서를 공고히 했다. 이 기간, 중국 역시 전략적으로 사고했다. 아태지역에서 미국의 지배적인 우위를 받아들였으며, 대외확장의 야심을 줄였을 뿐 아니라, 개혁개방 정책으로 전환하여 국내 민중의 생활을 크게 제고시켰다.

하지만 현재 중미의 두 지도자는 키신저 질서를 거부하고 있다. 오바마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과 이의 연장 선상에 있는 트럼프의 인·태 전략은 중국을 전략적 라이벌로 간주한다. 트럼프는 중국과의 무역전을 시작함으로써 본격적인 중국 견제에 들어갔고, 시진핑 역시 아태지역에서 만큼은 미국의 전략적 지위의 우위성을 쉽게 허락하지 않을 기세다.

이런 상황에서 향후 미국의 중심과제는 아태지역에서 전략적 우위를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이다. 불행히도 트럼프는 동맹국에 안보 재보증을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에 대한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현재 트럼프와 시진핑 모두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트럼프는 공개적으로 동맹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경제 민족주의를 고양할 뿐만 아니라, 미국 본토 우선주의와 일방주의 지향의 외교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미국 우선(America first)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 사실 이러한 기치는 전혀 미국답지 않다. 하나 마나 한 소리에 불과하다.

세계의 그 어느 나라도 자국의 국가이익을 타국의 이익 밑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미국의 구호는 아-태 지역에서의 미국의 주도적 지위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이와 동시에 시진핑은 군사력 증강, 방위 범위 확대, 분쟁 중인 영토의 통제권 강화, 역내의 지도적 지위를 점진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마침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수석 평론가인 기드온 라흐만(Gideon Rachman)은 최근의 칼럼에서 아시아의 전략적 질서가 죽어가고 있다(The Asian strategic order is dying)고 경고한다.

기실 키신저 질서는 동아시아에서의 역사적 분쟁과 충돌을 대부분 해결한 것이 아니라 잠시 동결(凍結)시켜 놓은 것이었다. 이제 기후가 변화면서 얼어붙어 있던 갈등들이 녹기 시작하고 있다. 러시아가 아태지역으로 회귀하고, 중러관계가 강화될 뿐 아니라, 미일 동맹, 한미 동맹이 이완되며, 한일관계 악화와 양안관계 긴장, 남중국해 충돌 증가 등 곳곳에서 기존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중미에 화해를 둔 키신저 질서가 붕괴하고 있는 과정을 이미 목격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결과 한반도의 외부환경 역시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당분간 미국은 한미 동맹을 쉽게 해체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은 아시아의 전략적 구조판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정부는 일체의 문제가 스스로 풀릴 것이라 기대하면 안 된다. 긴 시간을 볼 수 있는 전략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현재 지정학적 기후에 변화가 오고 있다. 얼음이 녹을 때가 가장 위험한 법이다.

강병환 논설위원 sonamoo3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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