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22:44 (목)
[특별한 인터뷰] 방송인 최불암의 '좋은 밥상.좋은 사회.좋은 방송'
상태바
[특별한 인터뷰] 방송인 최불암의 '좋은 밥상.좋은 사회.좋은 방송'
  • 박세호 기자
  • 승인 2011.11.08 19: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원한 ‘아버지’ 상, 가장 친근한 한국인 최불암을 만나다

 
[KNS뉴스통신=박세호기자]   요즈음 집안에 어른이 없고 사회에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고 한다. 핵가족화가 진행되고 아버지의 역할이 축소되며 가장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아이들은 모두 외아들처럼 천방지축 제 세상이다. 이러한 때에 인정이 있고 엄한 전통적인 아버지의 모습으로 이 사회의 한쪽 끝을 진중하게 지켜온 분이 있다.  동네 이웃처럼 친근하고  친구 아버지 같기도 한 이 사람.

TV에서 그리고 거리와 각종 행사장에서 쉽게 만나는 서민형 풍모의 방송인 최불암이다. 

최근 장지연 언론상(방송부문)을 받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과 함께  "한국인의 밥상" 제작을 위해 일본과 우즈베키스탄의 우리 교민들을 만나고 온 최불암을 방송국 작업현장에서 만났다.  스케줄이 꽉 잡혀 한 두번 일정을 다시 조정해야 할 정도로 그는 요즘도 바빴다.

문:   장지연 언론상을 수상하셨습니다.  비중이 큰 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마음가짐 등 소감을 들려주십시오.

답.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방송 분야에 있어서 우리가 재미있는 방송을 위해서 크게 노력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좋은 방송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분야에서 각자 역할대로 좋은 일을 하고 좋은 나라를 만들고 그래서 좋은 사회가 자리를 잡아 가듯  방송도 언론으로서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는데 특히 저는 방송 프로그램 하나 하나를 통해서 우리 각자 일 맡은 사람들이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경쟁과 성공과 인기 같은 것을 추구하게 마련이지만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면서 책임과 소명의식이 자리잡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라마 출연에 대해서 문의하자 채널 A에서 '천상의 화원'에 출연해 제작중인데  아버지의 역할이 강조되는 작품이라 기대해봐도 될 것 같다.

TV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만나본 방송인 최불암의 두 모습 사이에는 전혀 차이가 없었다. 그가 소탈한 자세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원만하게 교제하는 성품을 지녔다는 것은 몇 마디 대화에서도 드러났다. 파안대소하는 그 자세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관광업계 등 두루 상통하는 많은 인맥을 가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파안대소하는 방송인 최불암선생

 

 - 사인을 하면서 문구도 적어주는 자상함이 있었다/사진=김현수 기자

  각 분야 사람들을 만나서 최불암 선생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사람들의 대답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안다’, ‘모른다’가 아니라 자신이 ‘최불암과’ '친하다'는 것이었다.  한 문화계 행사 후 일행이 더운날 매운탕으로 함께 점심을 들면서  힘들게  후후 불어가며 먹어야하는 데도 서먹서먹한 좌중의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최불암 선생이 자주 큰 웃음까지  터트리면서 동시에 뜨거운 국물을 삼켜가며 무엇인가 계속 이야기를 진행하는 그의  성의와 화술에 감탄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기본적으로 남을 배려하고 즐겁게 해주기 위한 마음 씀씀이가 감동을 주는 모양이다."

"사회 각계에 친구가 많으신 것 같습니다. 칭찬해주시는 분들도 많고요.”

“다, 제가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해서 어울리다 보니 그런가 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는 사회활동에도 음으로 양으로 기여하는 바가 많아졌다고 한다.  짜장면 배달을 하면서 어린이들을 도왔던 김우수씨가 타계했을 때 이  ‘철가방 천사’에게는 가족도 재산도 없었다. 어린이재단이 그의 장례를 집행했다. 후원회장인 배우 최불암이 대표상주가 되어 문상을 받았고, 이것이 마지막 가는 고인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대중에게 부담없는 이미지 때문에 홍보대사 역할을 많이 했다. 시민대회 위원장 역할 등 서울시 홍보대사이기도 하다.  또 길거리 상가 축제인 명동축제 명예위원장으로 일했다. 그 옛날 명동은 대한민국 예술과 문화, 패션의 중심가였다. 그러나 소비의 축이 강남으로 옮겨진 후 명동 상권과 함께 상인들의 형편도 기울었다.

"그렇습니다. 명동 축제에 제가 관여했지요. 많은 사람들과 알고 지냅니다. 누구 누구 다 아시는 분들입니다.  서울시 홍보대사도 하고 있고요. 제 임기는 남았지만 서울시장이 새로 되셨으니까  계속 임명을 받을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 연기인 최불암
한국관광협회 전 회장 정운식 저 '세계를 여는 남자'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친근하게 생각하나 알 수 있다.

”명동축제에 축사를 하기 위해 단에 오른 한 지역 유지가 '존경하는 최불암 회장님 …' 라고 해야 할 것을 입이 얼어서 '존경하는 최O알 회장님 …'라고 연설을 시작하자 좌중이 폭소로 넘쳤다고 한다.  정 회장의 책 소식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최불암 선생은 서로 잘 협조하던 사이라고 안부 전해달라고 했다. (사람들의 친하다는 말이 빈말은 아닌 것 같다)

최불암 시리즈에 이런 대목도 있다. 최불암이 깡패를 만나 일행을 보호하려고 배트맨을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기억력이 좋지를 않아서 “배트랄” 이렇게 외쳤다.  배트맨이 알아 듣고 신속히 등장해 깡패들을 물리쳤다. 그런데 배트맨이 “왜 이름을 틀리게 불러?  너는 최O랄 이렇게 부르면 좋겠니?”하면서 최불암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악한을 응징하는 배트맨과 최불암은 동격이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사실 최불암이 무엇을 한 것은 아닌데 괜히 사람들이 건드리고, 기대를 하고, 배트맨을 결부시키고, 묘사를 하고 그저 껄껄걸 즐겁게 웃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최불암'이 있어서 행복했다.

그는 또 관광공사의 한국방문의 해와 관광홍보대사 등 인바운드 관광객 유치에 앞장을 섰고 관광협회, 그리고 지자체 등을 통해 많은 이벤트와 축제에서 관광인들과 협조를 했다. 관광객 유치가 어려운 일이었으나 상황이 역전되어 지금은 외국인들이 물밀 듯 들어와 관계자들의 웃음꽃이 피고 있다. 일본, 중국 관광객 뿐 아니라 세계 각국 ‘한류 팬’들이 입국해 고급 쇼핑객들이 찾아 명동의 경기도 살아나고 있다.  

명동 터줏대감인 최불암도 그 일익을 담당했었다. 명동의 낭만이 다시 살아난다면 최불암 만큼 반기고 흐뭇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국립국장 일대를 중심으로 그의 청춘을 보냈고 동료들과 함께 예술과 문화의 뿌리를 키웠던 곳이기 때문이다.

화제를 바꿔보았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여기에 있는 것 같았다.

문:  선생께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계시는 방송프로로 “한국인의 밥상”이 있습니다.

답:  처음에 전통 술인 막걸리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했습니다. KBS제작진에서 '한국의 음식을 해보자' 그랬습니다. 음식의 역사와 한국인이라는 내용이고  의의를 살려 가다 보면 밥상문화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40회차로 전남 무안 낙지 잡이에 대해 소개해 ‘갯벌과 인간 그리고 공생의 지혜’를 다뤘습니다.

한국의 밥상” 프로에 대한 시청자들 반응이 썩 좋다. 시청률 12% 안팎이다.
"한국의 밥상 최불암씨의 설명도 넘 좋고 또 다음 시간이 기다려진다...”  등 시청자 댓글과 평점도 계속 올라온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인의 밥상'을 진행하는 최불암    사진ⓒKBS제공

”최근에는 일본, 우즈베키스탄 등 해외도 두 군데 가서 교민들을 만났습니다. 한국음식의 뿌리는 깊고 방대합니다. 그분들이 우리  음식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눈물겨운 일 아닙니까?  고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썼던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그분들 연배가 저와 같은 분도 많으셨고  위의 분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먹는 것으로는 다 공통이예요. 그래서 음식이 곧 민족이요, 역사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갈 수록 역사와 전통을 잊고 살게된다.

" 1세대는 거의 작고하시고 2세대인데 이들은 한국말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먹고 살기 바빴던 것이지요. 그 교민들이 추렴해서 1960년대에 고국을 위해 보냈습니다.  88올림픽 때 또 정성을 모아 보냈습니다. 고국이 IMF를 겪을 때 이들이 또 보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그리 크게 바랐을까요. 그들은 태극기만 내려가지 않고 게양하도록 원했습니다. 이들이 아직 한국 음식을 보존하고  삽니다. "

최불암 선생의 주장은  계속된다. 정말 우리도 무엇인가 각성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고추장, 된장, 국거리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음식의 진수는 발효음식입니다. 건강과 생명력의 기초입니다. 조상등이  비법을 전수해왔지요. 젊은 주부들은 슈퍼마켓에 많이 의존하고 있어요. 우리 전통 음식 담그는 것도 차츰 잊혀져 갑니다. 우리 것을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때 그의 표정은 마치 "독수리 5형제가 없으면 누가 지구를 지키냐?"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우즈베키스탄  어머니는  전통음식이나 김치, 된장을 만들어 자식들에게 나눠준다. 그 어머니는 자식을 다섯 명 두었는데  모두 대학까지 보냈다.

선생은 또 안타깝게 지적한다. “제가 젊은 사람들에게 지방별 이런 저런 음식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려 하는데 우리 역사를 몰라서 못 알아듣는 거예요.”

요즘은 레시피(recipe 조리법)도 많고 음식문화와 요리에 대한 선택도 풍부해졌다. 작가 분들이 수고를 많이 하는데, 우리 전통음식 참고자료가 거의 없다고 한다. 고문헌 같은 것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사진=김현수 기자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전승되고 있습니다. 흑산도에 유배 시 호남지역 농수산물, 먹거리 자료를 연구해 수자원 일지를 남겼습니다.  남도 많은 섬들이 유배지였습니다. 귀향한 지식층들이 남도의 향토 음식문화를 만들었지요. 경상도에서는 종부 집 음식이 주였습니다. 윤택한 살림과 기풍을 살렸습니다. 가문의 전통이 지방의 대표 음식문화가 되기도 합니다"라고 설명을 했다. 

충청도에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전통이 강하다고 한다. 어리굴 젓과 여러가지 음식이 충청도 향토음식이 되었다. 강원도 지역은 교통이 험하고 눈이라도 오면 외부와 단절되던 특수 지역이다. 음식문화도 이런 환경에서 발달했다. 중부지방은 궁중음식과 함께 여러계층의 문화가 골고루 발달했다.. 선지국 감자탕 등 많은 음식 전통이 내려왔다. 좋은 농산물을 꾸준하게 공급해준 농민들이 큰 공로자들이었다.

요즘 트위터로 메시지를 날리고 페이스 북 같은 이른바 사회네트워크서비스(SNS)가 보편적인 시대가 되었다. 문의해 보니 최불암 선생은 블로그나 팬카페 그리고 SNS대열 등에는 합류하지 않은 듯하다. 다소 의외였다. ('new 최불암 시리즈'라는 것이 최불암 트위터로 나간다면 인기일텐데? 좀 아쉬웠다.)

한때 언로가 막히고 국민들이 답답해할 때 최불암 시리즈가 유행했다. 한두 명 트위터 정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전국적인 파급력과 함께 남녀노소를 망라해 대단한 인기를 끈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있다. 서민들은 영악한 사람들의 투기와 불법과 사회적 파탄을  바라보면서 무능과 소외감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고지식하고 순진한 최불암이  놀림당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약자를 도우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유머 앞에서 위로를 받았다.  최불암시리즈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동질감을 이루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미래를 확신할 수 있었다.

이름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 하나. 최불암은 불암산과 관계가 있다? 없다? ... 그동안은 관계가 '없다'가 대세였는데 올해 방송프로에 나와서 본명은 최영한인데 불암산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소개를 했다. 이번 인터뷰 때에도 본인에게 직접 확인을 했다. 한술 더 떠서 최근 노원구청에서는 최불암을 불암산의 명예산주로 임명했다. 불암산에 큰 자연사박물관을 유치하는 계획까지 추진하는 모양이다.

근처에서 눈치를 보던 중년의 여성 팬이 다가와 사인을 부탁했다. 사인과 함께 문구도 적어주느라 시간이 꽤 걸린다. 질문을 던졌다.  "최불암 선생 방송에서 어느 프로가 가장 기억에 남나요?"  별로 머뭇거리지도 않고 "전원일기요" 하는 대답이 나온다.

아버지로서 '바람직한 자녀관'에 대해서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최불암 선생께 코멘트를 요청했었다.  자신도 평범하게 열심히 노력했을 뿐이고 남들과 다 똑같았다고만 대답을 해주었다.

방송국 뜰에서 사진을 찍고 사진기자와 배웅을 했다. 걸어가는 뒷 모습을 보면서 저분이 이 시대 문화의 한 아이콘인 '최불암'이다. 그런데 만나보니 '최불암'은 역시 현실에서도 카리스마가 당당한  '최불암'이었다.  본인 말씀은  "자신은 작가가 써준 그대로 연기를 한 평범한 사람"일뿐이라고 한사코 주장을 하긴 했지만.

가을 바람이 휙 불어와 손바닥 만한 낙엽 몇 송이를 최불암의 가는 길 뒤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박세호 기자 bc457@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기기사
섹션별 최신기사
HOT 연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