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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의 정신이 출발한 민족의 성지 ‘봉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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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의 정신이 출발한 민족의 성지 ‘봉황각’
  • 오성환 기자
  • 승인 2022.09.13 1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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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각의 정신을 되살려,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될 날을 고대합니다

RELIGION/천도교 의창수도원

3.1 운동의 정신이 출발한 민족의 성지 ‘봉황각’

“봉황각의 정신을 되살려,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될 날을 고대합니다”

의창수도원(천도교 간부 연성수련 장소) 박충남 원장

[KNS뉴스통신=오성환 기자] 민족대표 33인의 영도자였던 손병희 선생은 3.1 운동 직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 모진 고문을 받았고, 병보석으로 출감했지만 병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1922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마침 인터뷰가 진행되었던 날은 의암 손병희 선생이 순국한 지 10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탈했을 때, 손병희 선생은 10년 안에 다시 나라를 찾고야 말겠노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의 소원은 오로지 조국의 독립뿐이었다. 10년 안에 독립을 이루겠다는 의지는 1919년 3.1 운동의 만세 함성으로 표출되었다.

3.1 운동 당시 우리나라의 천도교 교인 숫자는 610만 명에 달했다. 천도교의 3세 교조로서 손병희 선생은 15명의 천도교 대표자들에 앞장서서, 이승훈 선생을 비롯한 16명의 기독교 대표자들 및 만해 스님을 비롯한 2명의 불교 대표자들과 더불어 기미독립선언을 주도했다. 손병희 선생은 33명 중 독립선언서에 가장 먼저 서명했는데, 이는 자신이 가장 먼저 죽겠노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손병희 선생과 봉황각

조선말 서예가 오세창 선생이 직접 쓴 봉황각 현판이 보인다. 

손병희 선생은 나라 잃은 민족을 위한 교육과 독립운동가의 양성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문맹으로 남겨두려 했지만, 선생은 우리 민족이 문명인이 되도록 힘썼다. 유학생을 해외에 보내고, 계몽운동을 펼쳤으며,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교를 비롯한 24개 민족 학교의 운영을 지원하고 교사들의 월급을 지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립운동가 양성을 위한 손병희 선생의 열정을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는 곳은 강북구 우이동에 위치한 봉황각이라는 한옥건물이다. 현재 봉황각은 구 천도교중앙총부 본관 뒤편에 자리잡고 있고, 천도교 의창수도원 관내에 속해 있다. 현재 봉황각은 그 역사적, 교육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황각은 1912년 손병희 선생에 의해 직접 세워졌다. 의창수도원의 박충남 원장의 증언에 따르면, 봉황각 건축 당시 미아리고개는 호랑이와 멧돼지가 우글거리던 숲으로 전해들었다고 한다. 주택도 없고 주점만 몇 군데 서 있는 이 험한 지역에, 손병희 선생은 당시 돈으로 800원을 주고 3만 평의 땅을 구입했다. 선생은 보국안민을 내세워 일제로부터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이 자리에 건물을 세웠고, 천도교 교조 최제우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인 ‘봉황’을 따서 봉황각이라 이름 지었다.

봉황각, 3.1 운동의 발원지가 되다

1912년 봉황각과 수련도장이 현재의 모습으로 신축된 이후, 이곳에서 손병희 선생은 7년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일에 힘썼다. 선생은 483명의 천도교 지도자를 수련시키면서, 민족 종교인 천도교 신앙을 북돋을 뿐만 아니라, 독립 정신에 투철한 운동가로 그들을 키워냈다. 이 모든 일은 3.1 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 묘역(서울 강북구 우이동 북한산 자락)

비록 3.1 운동 직후 수련도장은 철거되었지만, 봉황각 및 부속 건물에 전시된 유물들을 통해 일제에 주권을 빼앗긴 당시 우리 민족이 지녔던 조국 독립의 의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박 원장은 당시 이곳에서 교육받았던 천도교 지도자들을 이렇게 평가한다.

“저는 그들을 영웅이라고 부릅니다. 1919년 그 영웅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신의 팔, 다리, 목을 내놓고, 재산을 다 내놓고 떠났습니다. 이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소중한 분들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1919년 2월 22일 봉황각에서 있었던 전국 특별 49일 기도에서, 손병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꼭 만세를 불러야하겠소.”

이처럼 손병희 선생은 봉황각에서 3.1 운동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세워나갔고,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화 라는 3대 원칙을 구상했다. 봉황각이야말로 민족의 성지이자, 3.1 운동 정신의 발원지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매년 봉황각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이 참여하는 3.1 독립운동 재현 행사가 열리고 있다.

지금은 봉황각의 정신을 되새길 때

시대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고 정치적으로는 정권교체가 이뤄진 이 시기를 두고, 박 원장은 우리 민족에게 매우 중차대한 때임을 강조한다.

“100년 전 우리 민족은 독립을 위해 힘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뭉쳤습니다. 그때는 남북이 하나였습니다. 민족대표자 33인을 보면, 남쪽이 19명, 북쪽이 14명이었습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은 남북이 갈라져있음은 물론, 남쪽도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박 원장은 남북이 무기가 아니라 윤리와 평화라는 가치를 통해 통일을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북의 문제만이 아니라, 보수와 진보의 대립, 지역과 지역의 대립, 세대와 남녀의 대립도 심각한 지경이라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이 100년 전처럼 다시금 하나로 뭉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러려면 우리 민족의 정신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봉황각의 독립정신을 귀감으로 삼는다면, 통일에까지 이를 수 있지 않을까요?”

광복 직후 김구와 이승만이 우리나라에 귀국했을 때 두 분 모두 가장 먼저 찾았던 곳이 바로 봉황각의 손병희 선생 묘소였다. 저마다 이념은 달랐어도, 손병희 선생에 대한 존경심은 한가지였다. 이 어른이 계시지 않았다면, 3.1독립운동도, 임시정부도, 조국광복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들에게 새겨져 있었다.

손병희 선생이 설립한 천도교 지도자 양성소 '봉황각'

프랑스혁명이 프랑스를 살리고 독립혁명이 미국을 탄생시켰듯이, 봉황각으로부터 출발한 3.1 운동의 정신이 우리 민족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박 원장은 확신한다. 천도교 의창수도원 박충남 원장은 남북이 하나되어 모두가 이곳 봉황각에서 손병희 선생을 참배하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염원한다.

오성환 기자 v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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