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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박상진 의사 ‘순국 100주기’ 추모식 11일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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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박상진 의사 ‘순국 100주기’ 추모식 11일 개최
  • 김유인 기자
  • 승인 2021.08.11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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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사순국100주년기념사업회 주관 울산문화예술회관서 진행

[KNS뉴스통신=김유인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독립운동가로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지낸 고헌 박상진 의사 순국 100주기를 맞아 추모식을 11일 오후 울산문화예술회관(대공연장)에서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번 추모식은 코로나19 방역대책을 수립한 가운데 순국 1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조직한 박상진의사순국100주년기념사업회(류복수, 이경림 공동대표) 주관으로 거행된다.

이날 추모식에는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해 기념사업회 대표 및 박상진 의사 유족, 울산시장 및 울산시의회 의장 등이 참석하며 행사는 국민의례, 추모사, 박상진 의사 업적조명, 추모 공연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추모식 이후, 박상진 의사 순국 100주기 추모 제례가 같은 날 오후 7시에 박상진의사추모사업회 주관으로 의사 생가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한편,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은 추모식에 앞서 울산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했던 고 김장수 독립유공자 유족을 찾아 위문의 시간을 통해 광복의 의미를 되새긴다고 전했다.

다음은 박상진 의사 주요 공적 내용.

박상진 선생은 1884년 12월 7일 울산 송정동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자(字)는 기백(璣伯), 호는 고헌(固軒)이다. 선생의 부친은 한말 승지를 지냈고, 선생이 출계해 모신 백부 시룡은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선생은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1910년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으나 경술국치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자 이를 사임했다. 이 같은 행동은 대한제국의 국민으로서 일제의 식민지 관리는 되지 않겠다고 하는 선생의 강렬한 민족의식이 표현된 것이었다.

1911년 망국의 설움을 안고 고국을 떠난 선생은 중국 만주를 여행하면서 허위의 형인 허겸과 손일민·김대락·이상용·김동삼 등 독립운동자들을 만나 투쟁 방략을 논의하고 모색하였다. 이때 중국은 신해혁명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선생은 이를 직접 목격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혁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박상진 의사는 1915년 7월 15일 풍기광복단과 제휴하여 대구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우선 군자금을 조달하여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여기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외 요지에 독립운동 거점을 확보하여 정보·연락망을 구성한 뒤, 적시에 무력으로 최후의 복적(민족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던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였다.

선생은 창립 당시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에 추대되었고, 부사령에는 황해도 평산 의병장으로 용맹을 떨친 이석대(본명 이진룡)가 선임됐다. 대한광복회는 창립 이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1916년에는 예산을 중심으로 하는 충남 일대, 해주를 중심으로 하는 황해도 일대, 보성을 비롯한 전남 일대, 그리고 서울·삼척·인천 등지에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군자금 강제 모집을 계속하면서 이를 거부하는 반민족적 친일 부호배들을 처단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먼저 선생은 부호들에게 대한광복회 명의의 포고문과 배당금 통보서를 발송하고, 이를 일경에 밀고하거나 납부를 거부하는 친일 부호배들은 처단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탄로됨으로써 선생은 1918년 봄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후 선생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유인 기자 yan20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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