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12:04 (토)
[포커스人] ‘윤붕구’ 충북 명장 1호 테일러 “단 한사람의 맞춤 명품을 위해 혼과 정성을 다해”
상태바
[포커스人] ‘윤붕구’ 충북 명장 1호 테일러 “단 한사람의 맞춤 명품을 위해 혼과 정성을 다해”
  • 이건수 기자
  • 승인 2018.12.14 1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IMF때도 꾸준했던 독보적인 기술과 실력으로 충북 명장 1호 선정
-의료사고 장애 딛고 휠체어에서 세상 유일의 옷 만들어, 1000여명의 단골 보유
- ‘기술서적’ 발간 예정, ‘대한민국 명장’ 도전
한국맞춤양복기술경진대회애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이 자신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윤붕구' 명장. <사진=이건수 기자>

[KNS뉴스통신=이건수 기자] 잘 나가던 인생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장애가 됐을 때 절망감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크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과 장애를 딛고, 다시 재활해 화려한 제2의 인생을 멋지게 펼쳐나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2016년 패선디자인 직종에서 충북 명장 1호로 선정된 ‘윤붕구’ GQ양복점 대표다.

2017년에는 대한민국을 빛낸 인물대상 ‘패션디자인발전공로부문’과 대한민국베스트인물대상, 올해도 ‘탑리더스대상’(패션부분)을 수상했다. (사)한국맞춤양복협회 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전국 최초로 지난 7~80년 산업발전의 주역들이었던 기능사, 기능장, 명장 등 100여명이 참여 속에 ‘기능인의 밤’도 준비 중이다.

청주시 서문동에 위치한 양복점에 들어서면 명장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명품 고객 옷들이 걸려 있고, 상패와 상장 및 위촉장 등이 가득 진열돼 있다.

지난 12일 고용노동부로부터 ‘대한민국 산업현장교수’로 위촉된 것을 축하하는 화환도 어느새 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약 6.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섬유의복’ 분야 산업현장교수로 3년간 위촉된 것이다.

한땀 한땀 장인의 정성스런 손길로 탄생한 양복은 고객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1982년 ‘기술라사’로 시작해, 1987년 북문로에 GQ양복점으로 새롭게 문을 열고 5~6년 운영하다, 지금의 서문동에 정착한지 17년. 

섬유산업이 우리나라 기간산업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던 1960~70년대는 양복점의 전성시대로 일컬어지고 있다.

서울, 부산 등 대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방 읍단위의 작은 도시에도 중심가에는 으례이 양복점이 들어서서 화려한 쇼윈도우를 자랑하며 상업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량생산체하의 기성복 유행에 맞춤양복이 자리를 내어주고, 주변 양복점들이 하나 둘 문을 닫는 상황 속에서도 ‘윤붕구’ 명장은 독보적인 기술력과 풍부한 경험으로 40년을 변함없이 맞춤양복 제작에 힘써 오고 있다.

윤 명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기술을 배우러 처음에는 작업복을 만드는 데 가서 심부름 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어깨너머로 익힌 기술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우리나라 세계 대회 출전 선수들을 양성하고 있는 ‘이성우’ 선생에게 지도를 받으러 서울로 출퇴근 했다.

그때부터 각종 기술경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되면서 전국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 충북지방기능경기대회 심사장, 충북장애인기능경기대회 심사장 등 심사위원으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청주교도소를 18년 다니면서 재소자들을 가르쳤다. 그 공로로 법무부장관상도 수상했다.

한국기능선수회 충북지회장을 맡아 회원들과 함께 충북 도내 오지와 사회복지 시설 등을 정기적으로 다니면서 봉사활동도 활발하게 펼쳤고, 심지어 2008년 중국 흑룡강신문사 초청으로 강의도 했다.

여기저기 지역 언론사와 방송사는 물론, 전국 방송에도 출연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이 굴곡도 겪는다 했는가? 2009년 뜻하지 않게 흉추디스크 의료사고로 하반신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수년간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고, 고난의 시간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윤붕구’ 명장은 타고난 열정과 불굴의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더욱 섬세한 감각과 고객만을 위한 진심,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품질에 대한 노하우로 세상에서 유일한 명품 옷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충북지체장애인협회 고문이다.

고객에게 빠트리지 않고 맞춤 양복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지극한 정성으로 늘 손님이 아닌 ‘내가 이 옷을 입는다’라는 생각으로 최고의 명품을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이니, 당연히 고객의 신뢰를 구축할 수 밖에 없다. 

소중한 재산 목록 1000여명의 단골 고객 명단도 보유하게 됐다.

“앞으로도 ‘한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이라는 신념 아래, 정성스런 손길로 고객에게 체형의 변화나 옷의 변형으로 인한 수선까지 평생 AS해 주는 감동을 선물하겠다.”는 ‘윤봉구’ 명장.

충북 명장에 이어 독보적인 기술과 실력으로 ‘대한민국 명장’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양복을 계속 할 것이라는 열정이 가득해, 분명 소망이 이루어 질 것이다.

또한, 내년에는 후진 양성을 위해 ‘기술서적’도 발간하겠다는 대한민국을 빛낸 인물대상 수상자이자, 40년 동안 맞춤양복 외길 인생을 걸어온 충북 명장 1호 ‘윤붕구’ 대표를 만나러 GQ양복점을 찾았다.

대한민국을 빛낸 21세기 한국인물대상(2017년)과 탑리더스 대상(2018년)을 수상한 '윤붕구' 명장. 

- 양복일을 하게 된 동기는.

고향이 청주시 강서동인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내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생업에 뛰어 들어야만 했다. 기술을 배우러 양복점을 다니고 있던 선배 권유로 작업복을 만드는 재복사에 취직했지만, 심부름만 시켜 곧 신사복 쪽으로 옮겨 기술을 배우게 됐다.

그때 당시 전도관이라는 곳에 저와 같은 입장인 사람들에게 중학교 수업을 받도록 했는데, 1년 정도 밖에 다니지 못하고 오로지 기술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어깨너머로 익힌 기술을 이왕이면 제대로 배우기 위해, 서울 명동에 있는 ‘이성우’ 선생님에게 지도를 받으러 찾아갔다. 12년째 우리나라 세계 대회 출전 선수들을 양성하고, 전문가를 키워내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었다. 청주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면서 기술을 전수 받았다.

그 당시 양복분야에서 한국이 세계대회 12연승을 기록할 정도여서, 기능인들은 각종 기능경기대회 나가서 수상을 해야 기술을 인정받는 시대였다. 한국이 모두 휩쓸어버려서 그랬는지 몰라도 어느 해부터 세계대회가 없어졌다.

실력자인 선생님 밑에서 열심히 기술을 연마해 드디어 1979년, 충북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해 첫 금메달을 수상한데 이어,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도 장려상을 수상했다.

그때부터 전국기술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 수상 등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되면서 이 선생님한테 배운 기술이 진가를 발휘하게 됐고, 그 기술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이후, 기능경기대회 최연소 심사위원으로 선정되는 영광도 안았고, 충북기능경기대회 심사장 15회, 전국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 3회, 충북장애인기능경기대회 20회 심사장을 맡았다.

충북지방기능경기대회 심사 채점 장면

- ‘맞춤양복’의 매력은.

일단, 우리 가게에 오면 옷을 맞춰 입고 멋쟁이가 되어 나간다. 내가 만든 작품이 손님들에게 잘 맞아서 멋지게 차려 입고 나가면, 고객도 만족하고 저에게도 최고의 행복이다.

단 한 분의 고객을 위해 한땀 한땀 정성껏 만든 옷은, 그 존재만으로도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장애 때문에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어도, 세상 단 하나뿐인 명품 맞춤양복을 위해 혼과 정성을 쏟아 예술 작품을 다루는 심정으로 만들고 있다.

기성복은 옷에다 몸을 맞추는 것이고, 맞춤양복은 단 한 사람만을 위해 맞추는 것이다. 개개인의 체형이 다 다르기 때문에 개성에 맞게 재단을 해서 380여 공정을 거쳐 완성하는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맞춤양복은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고 꾸준히 연구하고 노력하고 있다.

- ‘명장’으로 선정된 의미는.

충청북도 명장은 도내 산업현장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을 보유한 기술인을 우대하는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관련 조례를 제정해 2016년 처음으로 선정했다.

22개 분야 96개 직종 중 동일분야에서 15년 이상 도내 산업현장에 종사하며, 관련기능분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해 온 기술인을 대상으로 접수를 받았다.

시장·군수 등의 추천을 받아 6개 분야 9개 직종 13명이 신청돼, 서류심사와 면접심사를 거쳐 4명의 명장을 최종 선정했다.

중기계정비 심태섭님, 제과제빵 이종화님, 목칠공예 박근영님과 함께 패션디자인 직종에서 제가 충북 명장 1호로 선정(2016.11.14) 받은 것이다. 명장증서 및 현판, 그리고 기술장려금으로 매년 200만원씩 3년간 받게 됐다.

이것은 ‘명예’ 라고 생각한다. 학교나 단체 등에 강의도 나갈 수 있다. ‘명장’이 됐으니 고객들에게도 더욱 최선을 다 해야겠다는 책임 의식으로 마음가짐을 다짐하곤 한다.

지난 10월에는 전국 최초로 문을 연 아이엠재활학교에서 ‘재활에 성공한 장애인 충북 명장 1호’로서 환자분들이 갖는 어려움에 대한 공감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줬으면 좋겠다는 강의 의뢰가 있었다.

비록 의료사고로 장애인이 됐지만, 피나는 재활 끝에 단지 동작이 느릴 뿐이지, 혼자 생활이 가능하기까지 과정을 들려주면서 함께 소중한 시간을 가져봤다.

지난 12일에는 고용노동부로부터 '대한민국 산업현장교수'로 위촉돼, 앞으로 학교나 기업에서 강의 요청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008년 중국 흑룡강신문사 초청으로 중국 하얼빈사범대학교에서 양복기술에 대해 강의하는 사진.

- 멀리 ‘중국’에서까지 강의를 했다는데.

그렇다. 다치기 1년 전인 2008년, 중국 흑룡강신문사에서 초청이 왔다. 중국 하얼빈사범대학교에서 10월16일~17일 방문해, 강의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의 양복 기술수준이 뒤떨어져 있는 상황이라, 400여명 학생들 앞에서 양복에 대한 강의(재도, 재단)를 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다. 지역언론에서도 관심있게 보도해줬다.

그 이듬해에도 강의 요청이 왔으나, 불의의 의료사고로 인해 이어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 전국 최초 준비하고 있는 ‘기능인의 밤’은.

한국기능인선수회 충북지회장을 10여년 맡고 있으면서 늘 마음속에 있던 것이 ‘기능인의 밤’을 한번 진행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의료사고가 나는 바람에 준비를 못했다.

그러다가 충북 명장 1호로 선정되면서 각 분야 명장들에게 예산은 없지만 ‘기능인의 밤’을 갖고 싶은데 어떻겠느냐? 의견을 물어봤다.

거기서 나온 결론이 제가 ‘기능인의 밤 추진위원장’을 맡고, 각자 개인의 선택에 따라 함께 하기로 한 참여자들과 전국에서 최초로 14일, ‘기능인의 밤’ 행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기능사, 기능장, 명장, 등 100여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이들은 7~80년 산업발전의 주역들이었다. 그때 당시 세계대회 제패하면 카퍼레이드 할 정도로 대접받았다. 지금은 IT 때문에 많이 소외되고, 사기도 많이 떨어져 있다.

이런 행사를 통해 한 자리에 모여 그 영광의 시절을 되새기면서, 우리 기능인들이 다시 한 번 자긍심을 고취하고 서로 친목도 도모할 것이다.

추진위원장으로서 14일에 개최될 '기능인의 밤' 행사에 대해 추진위원들과 협의하고 있는 '윤붕구' 명장 <사진=이건수 기자>

- 뜻하지 않게 의료사고를 당했는데.

2009년 6월 대전에서 흉추디스크 수술을 받았는데 잘못돼, 세 번 수술까지 했으나 회복이 안 됐다. 대법원까지 갔으나 이미 몸은 장애인이 되었고, 받은 보상도 치료비 정도였다. 의료사고는 이기기 어렵다. 내년이면 10년 된다.

걷던 사람이 못 걸으니 절망감이 밀려왔다. 무기력해지고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까’ 원망의 나날이었다. 침대나 의자에도 못 앉아서 2년간 우울증에 시달려 약까지 먹게 됐다.

병원생활 4년째 생각이 바뀌게 됐다. 같은 병실에 입원했던 목디스크 환자 중에 ‘주사 한 방이면 싹 낫는다’고 했는데 의료사고가 발생해, 전신이 마비되고 목만 움직이는 환자였다 그것을 보고 ‘아! 저분보다 나는 그래도 낫지 않나’ 생각을 바꾸게 됐고 우울증 약도 끊었다.

이를 악물고 열심히 재활에 노력한 결과, 완전하지 못해 휠체어에 의지할 수 밖에 없지만, 단지 동작이 느릴 뿐이지 혼자 운전도 하고 모든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능해졌다.

퇴원 후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맡겼더니 손님들과 마찰이 생겨 할 수 없이 양복점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앉아서 해야 하니까 재봉이나 재단이 어렵고, 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작업실도 개조하고 피나는 연습 끝에 이제는 손에 익었고, 처음 오는 손님마저도 가봉이나 재단할 때 키도 맞춰주고 하면서 배려해 주고 있다.

덕분에 손님들의 옷을 정성껏 만들고 있다. 나는 복 받은 사람 같다. 기나긴 장애터널을 지나온 것에 대한 뿌듯함과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할 수 있어, 하루하루가 의미있게 느껴지고 있다.

'윤붕구' 명장이 2009년, 의료사고를 당해 재활에 성공하기까지 과정을 밝은 표정으로 이건수 총괄국장에게 밝히고 있다.

- ‘재활’하는데 힘들지 않았는가?

왜 힘들지 않았겠는가? 집 안에 장애인이 있으면 온 가족이 힘들고, 실망까지 하게 되는 슬픔이 밀려온다. 저도 ‘내가 이렇게 평생 살아야 하나’라는 고통과 괴로움이 매우 컸다.

그래서 운동도 안하고 계속 누워만 있게 되니, 더 나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조금씩 운동을 하니 좋아졌고, 여기에 힘을 얻어 계속 재활에 몰두하게 됐다.

이때 가족의 도움이 없었으면 재활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사랑이 있어 가능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소·대변도 못 가렸다. 침대에 끈을 묶어놓고 운동을 시작했다. 3년 6개월 동안 꾸준한 재활운동으로 완전하게 건강도 되찾았다. 흉추디스크 환자가 소·대변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은, 천 명 중의 한 명이 나올 정도라고 주변에서 대단하다는 평도 들었다.

지금도 휠체어를 움직이려면 팔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아침에 기지개를 켜면서 윗몸 일으키기 50번, 팔굽혀펴기 100번 한다.

그리고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보면 다리가 굳게 된다. 그래서 저녁에는 병원용 자전거를 1시간 정도 타면 뻣뻣하던 다리 근육도 풀린다.

- 지역을 위해 ‘봉사활동’도 펼쳤는데.

지금은 명예회장이지만, 한국기능선수회 충북지회장(1999~2009)을 맡고 있을 때 봄, 가을 충북도내 오지 마을 찾아 봉사활동을 펼쳤다. 

회원들이 기능올림픽 입상자들이기 때문에 옷 수선, 도배, 농기계나 가전제품 수리, 영정사진 촬영 등 못 하는 일이 없다. 정말 열심히 봉사했고 봉사 받는 곳에서도 만족했다. 지금도 회원들과 함께 봉사활동은 계속하고 있다.

또한, 교도소 강의도 했다. 제가 기능경기대회에 수상도 하고, 최연소 심시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니까 청주교도소에서 연락이 와서 1986년부터 18년 동안 봉제강사로 기술지도를 하게 됐다.

재소자들이 각종 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해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도 하고, 1년에 15명 정도 자격증도 취득했다. 1988년에 법무부장관상도 받았다. 지금도 청주, 울산 사는 제자 두 명하고 안부 전화나 가끔 양복점을 방문하기도 한다.

청주교도소 강의를 마치자 이어, 2005년 천안소년교도소에서 1년간 일주일에 두 번 기술을 지도해 100% 자격증을 취득시킨 기록도 있다. 지금은 교도소 내 양복직종이 모두 없어졌다.

- 기성복으로 인해 ‘맞춤양복’이 사양길이었다.

1960~70년대는 양복점의 전성시대였다. 하물며 지방 읍단위의 작은 도시에도 중심가에는 으례이 양복점이 들어섰다.

하지만, 인건비, 자재비 상승과 더불어 대량생산체하의 기성복 문화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맞춤양복은 그 설자리를 잃게 됐고, 오랫동안 유지해 온 명성 자리를 기성복에 내어주고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은 인기 영화 ‘킹스맨’에서 주인공의 멋진 양복 때문에 젊은층으로부터 붐이 일기 시작했다.

또, KBS2TV 드라마 ‘월계수 양복점’의 인기에 힘입어, 젊은 친구들이 점점 맞춤 양복에 관심을 갖고 찾아 주기 시작했다. 특히, 요즘은 옷을 타이트하게 입는 것이 대세이고, 턱시도도 빌리지 않고 맞춰서 결혼식을 올리는 경향이 늘고 있다.

이런 인기 흐름에 따라 몇몇 젊은이들이 체인점식으로 양복점을 열기 시작해 청주에도 20여 군데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고객들 치수만 재서 서울로 올려, 거기서 만들어 다시 내려 보내는 반 기성복형식이다.

원래 맞춤양복은 100% 수제품이다. 청주에도 세 군데 정도 양복점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획일화 되어 있는 기성복과는 달리, 맞춤양복은 질적 승부로 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고려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가할 수 있다

저는 IMF 때도 손님들이 꾸준히 있어서 큰 타격이 없었다.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한다. 제가 병원에 있어서 가게가 닫혀 있으면 손님들이 전화해서 그냥 가게에 앉아만 있어 달라고 할 정도였다.(웃음)

때문에 병원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생각을 바꾼 것이 너무나 잘한 것 같다.

산업현장교수로도 위촉된 '윤붕구' 명장이 의료사고 후유증으로 휠체어에 의지하면서도 단 한사람의 명품 옷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다. <사진=이건수 기자>

- 명품 맞춤양복이 탄생하기 위한 ‘노하우’는.

사람마다 개성이 다 다르듯, 양복도 손님의 체형과 개성을 생각해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오랜 세월을 거쳐 쌓은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정성스런 손길로 옷을 제작한다.

저는 고객 ‘체형’을 파악하는 것이 제일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의사가 진료를 잘해야 하듯, 체형에 맞게 재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크다고 편한 옷이 아니다. 고객에게 딱 맞고 포인트가 정확하면은 옷이 편하다.

손님 중에는 가슴이 크거나, 어깨가 굽었거나 한쪽으로 기우는 체형들이 있는데 이런 점을 잘 맞춰서 재봉할 때도 체형에 맞게 자리잡음을 잘해야만 옷이 맵시가 난다.

재단은 굴신으로 했는데 재봉을 반신해 놓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소매 위치도 표준체는 똑같이 달지만, 굴신체나 반신체는 소매 위치가 각기 틀리다.

재단부터 재봉 하나 하나까지 세심한 관찰과 기술, 정성 그리고 정직한 마음으로 양복을 제작해야 한다. 그래서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저는 이제 오래 하다 보니 손님을 딱 보면 어떤 양복이 어울릴지 감이 올 정도다.

핸드메이드로 완성된 맞춤양복은 대를 물려 입어도 되고, 또 한 번 치수를 재면 그 다음부터는 전화 한 통으로도 옷을 제작할 수 있는 실용성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

- 기억에 남는 손님은.

이런 일을 수십 년 하다 보면 고약한 손님이나 속 썩이는 손님, 그리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손님이 왜 없었겠는가? 그 중에 기억나는 사람은 대전에서 맞춘 옷을 이미 세 번이나 수선했는데 맘에 들지 않아 골치를 썩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저희 가게를 지나가다 들렸다면서 ‘만약 제 것을 고쳐 주면은 평생 단골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평소 세탁소에 다림질을 맡겨도 맘에 안 들어 다시 자신이 다림질을 한다는 성격이라고 덧붙였다.

2~3일 만에 제가 정성껏 고쳐서 드렸더니 너무나 좋아했다. 그래서 15년 단골이 됐고, 지금도 이곳에서만 옷을 맞춰 입고 있다.

기술경진대회 때부터 ‘이성우’ 선생에게 제대로 된 기술을 전수 받았다. 그래서 체형 보완 같은 기술이 확실히 다른 사람보다 남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체형이나 특이한 체형도 다 수선할 수 있어, 어디서든 수선이 안 되는 것도 저한테는 OK다.

그러다보니 40년간 1000여명의 단골 고객 명단을 갖고 있다. 소중한 재산목록이라고 생각한다.

40여년 맞춤양복을 하다 보니, 손님을 딱 보면 어떤 양복이 어울릴지 감이 올 정도라는 '윤붕구' 명장 <사진=이건수 기자>

- 평소 갖고 있는 신념은.

저 자신에게나 동종업종 기술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것은 ‘내가 입을 내 옷 같이 만들어라!’, 그냥 돈만 생각하지 말고 ‘공들여서 명품을 만들어라’, ‘정성스럽게 바느질 한땀 한땀 하라’고 주문한다. 기술자들 특유의 성질로 대충하고 돈만 벌려고 하면 안 된다.

또한, 정직하고 고객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손님이 잘못됐다고 하면 곧바로 시인하고 수선해 주면 된다. 비단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생활도 ‘정직’이다.

가족에게도 가훈처럼 ‘진실하게 봉사하면서 살아가자, 손해를 보더라도 도움을 주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거짓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 봉사도 하면서 늘 정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 앞으로의 꿈은.

내년에 ‘기술서적’을 발간할 계획이다. 현재는 기술자 위주로 된 전문서적 밖에 없다. 그래서 의상학과 나오면 다 따라 할 정도의 눈높이에 맞춰 기술서적을 발간할 예정이다.

양복 기술을 본격적으로 배우려면 1~2년으로는 어림없다. 양복을 배우려는 제자들이 많이 찾아온다. 그러면 이 길이 험난하고 힘드니 평택국제대학교에 있는 양복학과로 가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그래도 저에게 와서 돈도 벌면서 배우겠다는 제자들에게 2~3시간 가르쳐 주지만 대부분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이런 제자들을 위해 쉽게 순서만 따라 해도 만들 수 있는 참고서 수준의 책을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고단수는 안 되겠지만 자꾸 따라하다 보면 기술이 향상될 것이고, 나름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핸드메이드 맞춤양복 같은 경우 후계자가 있으면 상호도 이어받을 수 있다. 명맥을 이어갈 후계자 양성 계획은 있으나, 현재까지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최근에도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제자가 있어 1년 6개월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버티지 못하고 그만뒀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오래 배우려고 안 한다. 맞춤양복 기술은 수년, 수십 년을 배워야 하는 고단한 길이기에, 쉽게 얻으려고 하는 요즘 젊은이들하고는 잘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지난 12일,기술전문가 192명을 대상으로 개최한 ‘대한민국 산업현장교수‘ 위촉식에서, 윤붕구 명장은 ’섬유의복‘ 분야에 위촉장을 수여 받았다.

- 끝으로 한 말씀.

꼼짝도 못 했던 제가 재활을 통해 비록 장애인이지만, 내가 원하는 맞춤옷을 계속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한다.

때문에 제가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양복연구와 고객 한사람을 위해서라도 더 편한 옷, 가벼운 옷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또한, 명장이 됐기 때문에 사회봉사도 더 열심히 하겠다. 제가 겪어보니까 건강이 최우선이니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고, 고객들에게 항상 겸손과 정직한 마음으로 멋진 단 하나의 명품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지난 12일,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총 11개 분야에 기술전문가 192명을 대상으로 개최한 ‘대한민국 산업현장교수‘ 위촉식에서, ’섬유의복‘ 분야에 위촉장을 수여 받았다. 약 6.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산업현장교수로 위촉됐다.

기간은 오는 2021년까지이다. 학교나 기업에 제가 보유한 양복에 대한 축적된 경험과 기술, 성공이야기 등을 아낌없이 전수해 후진 양성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또한, 저에게 직접 와서 개인 지도를 1년 6개월만 받으면 어느 정도 맞춤옷을 만들 수 있다. 그런 마인드를 가진 젊은이들이 오면 무료로 양복에 관해 궁금한 사항이나 기술을 가르칠 용의가 있다. 올바른 마음 가지고 혼자 자립해서 개업할 수 있도록 지도할 생각이 있으니 언제든 환영한다.

장애인 여러분들도 희망을 잃지 말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조금씩 꾸준히 운동하면서 극복을 한다면 좋은 일만 가득하리라 확신한다.

 

이건수 기자 geonba@kns.tv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기기사
섹션별 최신기사
HOT 연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