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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의 충격 증언, "김정일 애도기간에 탈북하면 총살에 3대 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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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의 충격 증언, "김정일 애도기간에 탈북하면 총살에 3대 멸족"
  • 조해진 기자
  • 승인 2012.03.07 1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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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탈북자 북송 반대 시위 격화...연예인 등 유명 인사 동참 확산

▲ (사진=조해진 기자) 2004년 탈북한 이철수(가명)씨

[KNS뉴스통신=조해진 기자]중국의 탈북자 강제 북송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대두되면서 강제 송환을 반대하는 시위들이 연이어 이뤄지고 있다.

중국 대사관 앞에서 중국으로 탈북한 이들이 북한으로의 강제 소환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차인표, 신애라 부부, 박미선, 김범수 등 여러 연예인들이 시위에 동참하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되는 양상이다.

또한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탈북자들의 강제 송환을 반대한다며 11일 동안 단식 투쟁을 벌이다 실신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많은 이들이 탈북자 구조에 뜻을 동참하고 있다.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도 탈북자 모녀의 이야기를 듣고 등 국제사회도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지난달 29일 <KNS뉴스통신>은 이번에 붙잡힌 33명의 탈북자들 중 강제 북송된 탈북자의 친인척인 이철수(59.가명)씨를 만나 친인척의 북송 상황에 대한 현재 심정과 중국으로 탈북 당시의 상황과 고충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

탈북시도하다 잡혔다는 얘기에 가슴이 철렁... 시범케이스로 총살할 가능성 커

2004년 탈북한 이철수씨는 현재 강제 북송된 탈북자들 중에 처조카(29.여)가 포함됐다고 밝혔다. 이씨 가족이 탈북에 성공했으니 자신도 따라가겠다며 탈북을 시도한 것이다.

이씨는 처조카가 “김정일 애도기간에 탈북을 하면 3대를 멸족한다는 등의 공식 통보를 했기 때문에 위험한 시기니 특별히 조심해야한다고 당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탈북을 시도했다 붙잡혔다. 브로커를 통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아내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전하며 “전화를 통해 소식을 들으니 보위부에서 쓸어닥치고 당에서 다 와서 처제가 까무러치고 난리가 났다. 처조카의 가족들이 도움을 달라고 요청하더라”며 위험한 상황에 처했던 처조카의 가족들의 상황을 전했다.

그는 “중국을 통해 돈을 천만 원 가량 보냈다. 다행히 부친 돈이 효과가 있었는지 좋은 소식을 들었다”며 아내가 그제서야 한시름 놓고 잠을 잔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북한에서도 돈을 찔러 주고 감옥에서 내보내달라하면 보내주기도 한다는 것.

그러나 “돈을 받은 사람이 통보를 해줬을거다. 아직 안심은 이르다”며 작은 불안감을 드러냈다.

이씨는 “탈북자에 대한 지시가 공개적으로 공포됐고 국제적으로 이슈화 된 상황이기 때문에 (북한) 법의 위용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시범적으로 총살을 당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라며 탈북자의 강제 북송 상황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야한다고 강조했다.

붙잡힌 가족들 보며 흘린 피눈물... 이제는 옛 이야기로 할 수 있어 다행

이씨는 북한에서 지질대학을 나왔지만 (북한에서는 대학을 지정해준다고 한다) 인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야간 대학을 다니며 인문학 공부를 이어갔고 마침내 북한에서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여러 차례 중국을 다니게 되면서 북한과 다른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게 됐다. 한국에서 발행된 책과 여러 한국 제품들도 중국에서 처음 접했다. 모든 것이 새롭고 북한의 실정보다 좋아보였다.

“북한에서는 발언을 잘못한 것이 걸리면 보위부가 찾아온다. 보위부에서 조사가 시작되면 언제 끝난다는 기약없이 그 사람들 마음대로 한다. 보위부의 조사 대상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도망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말한 그도 무심결에 한 발언이 문제가 됐다. 다행히 조사가 이뤄지기 전 보위부의 친구들이 조심해야 될 것 같다고 귀띔을 해줬다고 한다. 중국을 다녀와 북한 사회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진데다 보위부 조사라는 압박이 들어오자 이씨는 결국 탈북을 결심했다.

“2004년 가족들과 처제 식구를 포함해 모두 여섯 명이 탈북을 위해 나섰다. 브로커를 통해 중국으로 넘어와 한국 영사관 앞까지 왔지만 중국 경찰에 온 가족 모두가 붙잡힐 위기에 처했다. 붙잡히면 외국인 수용소로 보내진 뒤 강제 북송되는데 당시 남자의 경우는 용서 없이 총살이었다. 여러 명이 덮치는 것을 간신히 뿌리치고 도망쳤으나 아내와 딸, 처제 등은 여자이기 때문에 그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 붙잡히고 말았다. 가족과 함께할까도 망설였지만 ‘나라도 한국으로 가 가족들을 지원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도망쳤다”며 탈북 당시 붙잡힐 위기에 처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는 가족들이 붙잡힌 것을 보고 피눈물이 났지만 한국에 들어와 살리겠다는 생각으로 뛰었다. 무책임했던 브로커 대신 다른 브로커를 찾아 다시 탈북을 시도했다. 또 다시 영사관 앞에 온 그는 함께 탈북을 시도한 다른 사람들과 미로처럼 구부러진 철로된 다리를 통과해 마침내 영사관의 두꺼운 문 앞에 다다랐다.

이씨는 “중국에서 설치한 구부러진 좁은 다리만 없었더라도 탈북이 그렇게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한국 영사관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좁고 구부러진 철로된 다리를 지나 몇 개의 문을 통과해야했다. 첫 번째 문에서는 신분증을 보여준 사람만이 한 명 한 명 통과하고 빗장을 걸었다. 그 틈에 돌진하기는 쉽지 않았다. 퇴근 시간을 틈타 문 사이가 닫히기 전 급하게 들어가려 돌진했다. 그러나 앞에 경비들이 자세를 잡고 버티고 있었다”고 위급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이럴 때 브로커가 사용하라고 준 망치가 있었다. 직접 공격하진 말고 시늉은 내야한다면서 줬던 것이다. 망치를 들면서 위협을 가하자 경비들이 놀라 달아났다. 그 틈을 타 빗장을 제거하고 문을 통과했다. 그랬더니 당시 상황을 지켜보던 중국인들이 환호를 하더라.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아 무척 창피했다. 뒤돌아 나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세 개의 계단을 지나 영사관 앞의 철문과 마주섰다. 내려온 철문을 무슨 힘이 나서 들었는지 철문 아래가 꺾였고 그 틈사이로 영사관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카운터에 있던 아가씨가 ‘이게 돈이 얼마나 드는데 문을 부셔놓냐’면서 계속 불평을 해댔지만 들리지 않았다. 들어가니 아직 수속이 끝나지 않은 탈북자들이 많이 있었다. 한 쪽에 앉아있으니 키 큰 관리가 와서 ‘수고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라고 말을 건네더라. 하늘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 같았다”며 탈북에 성공한 감회를 표현했다.

그는 탈북을 위해 영사관 마당의 차 밑에서 이틀밤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틈을 보다 들어와 영사관에서 만세를 부른 사람도 있다며 “한국처럼 밀항을 했을시 벌금을 물린다거나 했다면 그정도까지 하진 않았을거다. 잡혀가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목숨을 거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아내와 딸, 처제 가족들이 붙잡힌 것을 뒤로한 채 혼자 도망치면서 피눈물이 났지만 지금은 그 때 선택을 잘 했다고 생각한다. 가족들을 따라 갔었다면 남자였기 때문에 반드시 죽었을 거다. 다행히 잡힌 가족들은 모두 여자이고 아이였기 때문에 목숨은 부지했다. 아이들은 감옥에 가지 않지만 어른들은 감옥에 가서 모진 고초를 당한다. 한국에 와서 추후 돈을 보내 중간에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고 가족들도 탈북에 성공했지만 아내는 지금도 감옥에서 당한 고초 때문에 앓는 소리를 낸다. 하지만 총살을 당하지 않은게 어디냐”고 소회를 밝혔다.

▲ (사진=조해진 기자) 2004년 탈북한 이철수(가명)씨

탈북 후 중국에서의 3년... 손가락 잃고 숨 죽여가며 지냈다

이씨는 “중국에서 3년을 떠돌아 다녔다. 공안 단속을 피해서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북한에서 해보지 못한 일들을 연변에 와서 했다. 지질대학을 나왔으니 탄광에서 6개월을 일하기도 하고 온돌 수리, 종이원료 만들기 등 할 줄 모르는 일도 닥치는 대로 했다”고 중국에서의 생활을 밝히며 중국에서 힘든 건 박해를 당하는 것보다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과 말이 통하지 않는 점 때문이라고 밝혔다.

“나를 얼마나 죽이고 사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박해라기 보다는 사람 대하기 나름이다. 그러나 그 곳에서 사용하는 중국말을 모르니 말을 하지 않으면 탈북자인 것이 들통난다. 그러면 일체 자기를 죽이고 내가 잘했든 못했든 그 곳의 사람들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설명한 그는 “아이들이 그냥 돈을 달라고 해도 돈을 주는 것이 낫다. 눈 밖에 났다가 누군가 탈북자인 것을 신고하면 중국에서 바로 잡아가기 때문이다. 신고가 안 된 상태에서는 중국 경찰도 알아도 못 본척 하지만 신고를 받으면 바로 처리한다. 잡히면 북송되고... 인생이 끝난다. 그런 상황이니 숨쉬기도 힘들다”며 중국에서 숨 죽여 살았던 고충을 토로했다.

이씨는 탈북한 뒤 중국에서 일을 하다 두 손가락의 몇 마디를 잃었다. 그는 “먹고 살겠다고 종이 원료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다 손가락을 잃었다. 토막을 낸 참나무를 톱으로 쪼개는 일이었는데 그 톱에 잘렸다. 신분이 있었다면 보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중국 돈으로 5,000위안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분증이 없으니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며 “한국에 오고 나서 잘린 손가락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장애 6급 판정이 나오더라. 손가락은 중국에서 잘렸는데 보상은 한국에서 받은 셈”이라고 실소했다.

이씨는 “젊었을 때 (한국에) 왔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운 생각도 들고... 하지만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한다”며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고 소탈히 웃었다.

<계속- 2탄 : 탈북자가 말하는 북한 생활상>
 

조해진 기자 sportjhj@kn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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