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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人] 식품조각·일식조리 명인 ‘김현룡’서원대 교수 “조리사관기술대학을 설립해 조리중간간부 양성하는 것이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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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人] 식품조각·일식조리 명인 ‘김현룡’서원대 교수 “조리사관기술대학을 설립해 조리중간간부 양성하는 것이 목표”
  • 이건수 기자
  • 승인 2018.11.29 2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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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세계 최초 스시뷔페 상용화시킨 총주방장, ’04년부터 강단에서 후학 양성
- 현장실무위주 교육 강조, 제자들 각종 대회 수상 휩쓸어
- “나 자신이 부지런하면 다른 사람이 즐겁게 먹을 수 있다"
식품조각·일식조리 명인 ‘김현룡’ 서원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교수 <사진=이건수 기자>

[KNS뉴스통신=이건수 기자] 식품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식품조각·일식조리 명인이자, 서원대학교 호텔외식조리학과 ‘김현룡’ 교수는 20여 년의 호텔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강단에서 철저한 현장실습교육을 통해 미래의 조리사들을 양성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제자들이 취업 및 창업은 물론, 각종 전국조리경연대회를 석권하고 있다. 음식에 예술을 가미한 명인 ‘김현룡’ 교수는 국내 최고 실력자임이 분명하며, 이는 곧 충북의 자랑이자 명예라 할 수 있다.

‘김현룡’ 교수는 명문인 포항제철공고를 졸업 후 일류회사에 입사했으나, 쉽사리 적응을 못해 방황하던 중, ‘요리간판’을 보는 순간 사표를 던지고 마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한다. 

피나는 노력 끝에, 1980년 경주조선호텔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조리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3년 김 교수는 코리아나호텔로 옮기면서 일식당 ‘사가에’를 통해 또다른 조리인생의 원동력을 얻게 된다. 이곳에서 새벽부터 마감까지 열심히 일한 결과, 29세의 나이로 최연소 수장이 된다.

이후, 1991년 경주힐튼호텔 일식주방장으로 옮긴 후, 현장에서 탁월한 아이디어로 끊임없이 다양한 요리 개발과 각광을 받는 조리사로 성장, 10 여년 만에 총주방장까지 올라간 입지적인 인물이다.

김 교수에게 1991년 경주힐튼호텔이 오픈하면서 일식주방장으로 자리를 옮겨 맞이한 첫 오픈기념파티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뭔가 새로운 오픈기념파티 일식요리를 궁리하던 중, 세계 최초로 당시 엄청난 재료비가 투입되는 스시뷔페를 선보였던 것이다.

그룹 회장 부부가 파티 입구에 들어서면서 어마어마하게 뷔페로 차려진 일식요리를 보면서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뒤따라오던 국내·외 힐튼호텔 사장단들로부터 환호가 터져 나온 것이다.

그 순간 이것으로 메뉴를 만들어 봐야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이듬해에 세계 최초로 ‘스시뷔페 상용화’를 실현했는데 대박 메뉴가 됐다.

그 당시 일본 스시뷔페는 우리나라 모든 뷔페를 통틀어 가장 비싼 가격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인데도 문정성시 대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어디서나 쉽게 맛볼 수 있는 일식뷔페 효시가 된 것이다.

당시 국내에 내 노라 하는 주방장들은 반드시 이 호텔을 다녀갔고, 일본에서도 유명 주방장들이 건너와 김 교수에게 요리를 배워 갔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지금도 전 세계 어디서나 스시뷔페를 맛볼 수 있게 해 준 조리사가 바로 ‘김현룡’ 교수이다.

이런 열정과 자부심으로 이뤄낸 성과를 인정받아, 2011년 제2호 식품조각(카빙)부문, 2013년에는 제3호 일식조리(카이세끼 요리) 두 분야에서 ‘명인’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어, 2015년에는 ‘복어조리’ 고수에도 선정됨으로써, 명실상부 최고의 일식조리사 반열에 등극하게 된다. 더불어 이런 업적을 인정하는 ‘탑 마이더스상’도 수상했다.

어느 날 조리고등학교 교감선생님이 찾아와 특강을 요청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7년간 외부강의를 병행하던 중 2004년, 24년의 호텔현장을 뒤로하고 경주대학교 외식산업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게 된다.

그 이후, 1년간 위덕대를 거쳐 2013년 3월, 고향을 떠나 낯선 청주 서원대학교에 정착하게 됐다. 서원대학교 외식산업학과가 호텔외식조리학과로 명칭이 변경되고 우리나라 최고 시설을 자랑하는 실습동도 마련했다.

그러면서 엄격하고 철저한 현장 실습을 통해 제자들을 교육시켰다. 그 결과 서원대 학생들은 각종 전국조리경연대회에서 1년에 2~3번씩 장관상을 수상하는 것은 기본으로, 각종 상을 휩쓸다시피 성적들이 일취월장했다.

생선초밥(왼쪽)과 생선어묵 만들기 튀김의 기술을 지도하고 있는 '김현룡' 교수

김 교수는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청소를 1시간 이상 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요즘 청소년들은 집에서도 청소를 안 한다. 학교에서 더더욱 청소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도 청소를 강조하는 이유는, 어디서든 신입사원이면 처음부터 조직생활을 경험해야 되기 때문에, 청소를 통해 마음 준비를 단단히 시키는 것이다.

그래야만 어딜 가든 바로 적응이 되고, 그 덕택에 서원대학교 조리학과 실습환경 은 깨끗해 질 수 밖에 없다.

또 한 가지는, 사회 일선현장실무와 동일한 현장 위주의 수업을 실시한다. 졸업 후 바로 현장에서 빠르게 적응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맥락선에서 김 교수는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는 허전함이 있다.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조리사관기술대학’을 아직 실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립 이유는 단순하다. 현재 학교에서 배운 교육이 현장에 가면 다시 시작하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면서 학교에서 배운 실습 교육을 그대로 접목시킬 수 있는 ‘전문 조리학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4년 동안 열심히 피땀 흘려 배운 학교 교육이 무시되고, 현장에서 다시 배우는 모순점을 극복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졸업 후 바로 현장에 적응할 수 있도록 조리 중간간부를 양성하는 길‘임을 거듭 주장했다.

오롯이 체계적이고, 엄격하고, 그러면서도 자부심이 가득한 창작과 정직한 마음으로, ‘내가 만든 요리가 만족할 때까지 손님에게 내놓지 않겠다’는 자부심으로 언제, 어디서나 최선의 다하는 조리사 육성에 대한 욕심이자, 어쩌면 지도자로서 당연한 바람일지도 모른다.

또한, 김 교수의 바람을 80%는 이해하고 20%는 아직 따라오지 못하는 점을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졸업 후 현장에 나가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아! 그때는 교수님께서 왜 그런 점을 강조했는지를 못 느꼈지만, 현장에서는 바로 느낄 수 있는, 기억할 수 있는, 그리고 고마워 할 수 있고, 잊지 못하는 스승님이 되고자 한다.“고 덧붙인다.

그것은 명인이 되기까지 그동안의 노력과 열정을 고스란히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제자들을 위해 힘써 주고 있는 진정한 스승의 모습이자, 명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오늘도 연구실과 실습실을 오가며 조리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는 식품조각과 일식조리 명인이자, 복어조리 고수까지 조리계 정상에 우뚝 서 있는 서원대학교 호텔외식조리학과 ‘김현룡’ 교수를 연구실에서 만나 명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조리사관기술대학’을 통해 미래 후학들 양성 계획 등을 들어봤다.

서원대 '김현룡' 교수의 식품조각(카빙)과 일식조리(카이세끼요리) 두 분야 명인 인증서

- 식품조각(카빙), 일식조리(카이세끼요리) 두 분야 명인이신데 먼저 ‘식품조각’이란?

‘식품조각’이란 야채와 과일로 여러 가지 동물, 꽃, 조류 등을 조각해서 좀 더 조리를 돋보이게 하는 공예 기술을 말한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색과 모양을 조각해, 음식을 돋보이게 하고 화려하게 만드는 ‘식품 조각’은 시각을 만족시키고 식욕을 돋게 한다.

미래의 차별화된 고급요리를 만들기 위해 고심하다가, 일본에서 연수교육 중에 주말에 최고의 요리집은 무엇이 차별화 되어 있는가를 보기 위해 현장 답사를 했다. 소개받아 식사 가격을 알아보니 1인분에 50만원이 조금 넘는 가격이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꼭 한번은 접해 보고 싶었다. 식사를 하면서 요리 속에 무와 당근 등의 모양내기를 보며, 이것이 미래의 요리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리를 시작하면서 꽃꽂이를 배웠는데, 그때부터 꽃꽂이처럼 ‘어떻게 하면 나만의 독창적인 것이 무엇일까’ 생각 끝에, 식품조각을 접목시키면 남들과 차별화 시킬 수 있겠다 싶어 식품조각을 배웠다.

식품조각 명인 '김현룡'교수의 대한민국 '식품조각 화환' 첫작품

처음으로 ‘식품조각 화환’을 만들어 봤는데 고객들의 호응이 좋았고, 확실히 제 요리가 남들 요리보다 훨씬 돋보였다.

이후, 식품조각을 깊이 공부하면서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에 꾸준히 노력한 결과, 2011년 ‘명인’이라는 영광까지 얻게 됐다.

‘식품조각’ 한 작품 작업시간은 난이도에 따라서 20분~1시간 걸리는 게 있고, 몇 시간, 며칠이 걸리는 작품도 있다. 그러면서 식품조각을 만들다보니 재료들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도 터득했다. 학생들에게는 조리데코레이션 실무라는 과목으로 실습을 진행하고 있다.

식품조각 데코레이션

- 이어 ‘일식조리 카이세끼’란?

2013년 ‘일식조리 카이세끼’ 제3호 명인으로 선정됐다. 이것은 식전에서부터 식후에 후식까지 코스별로 나오는 최고의 ‘연회요리’라고 말한다.

옛날에 승려들이 절에서 생활하다 보면 배불리 먹을 수가 없었다. 이런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따뜻한 돌을 품고 자기도 하고, 차 한잔하면서 간단히 먹었던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현재는 술을 즐기기 위한 요리로 술과 식사를 중심으로 한 정찬요리로, 주연요리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코스도 다양하다.

연회요리 메뉴의 순서로는 진미➯샐러드➯전채요리➯맑은국➯회요리➯구이요리➯조림요리➯찜요리➯주방장 특선요리➯튀김요리➯초회요리➯식사➯후식 등 순이다.

제가 두 분야의 명인이 됐지만 특별한 비법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옛말에 만물박사가 굶어 죽는다’는 말이 있다. 제 경험으로는 여러 가지를 다양한 분야를 하는 것보다, 한 분야를 깊이 연구하며 파고들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울러 전공분야의 꾸준한 봉사 활동과 자기분야에 대한 열정적인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싶다.

대한민국 향토대전 최고지도자상 수상자들과 기념찰영(왼쪽에서부터 세번째)

- 김 교수는 ‘스시뷔페를 상용화’시킨 주인공으로도 유명한데.

1991년 경주힐튼호텔이 오픈하면서 일식당(Genji) 주방장으로 자리를 옮겨 맞이한 첫 오픈기념파티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뭔가 새로운 오픈기념파티 일식요리를 궁리하던 중, 세계 최초로 당시 엄청난 재료비가 투입되는 스시뷔폐로 만들어 봤다.

그룹 회장 부부가 파티 입구에 선두로 들어서면서 어마어마하게 뷔페로 차려진 일식요리를 보면서 안색이 좋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서 들어오던 국내·외 100여명의 사장단에서는 회장님과 다르게 환호가 터져 나왔다.

 ‘어떻게 이런 요리를 생각하고 표현해 냈냐?’며 탄성과 함께 ‘원더풀’ 이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이것으로 메뉴를 만들어 봐야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이듬해에 세계 최초의 ‘스시뷔폐 상용화’를 실현했는데 첫날부터 대박 메뉴가 됐다.

그 당시 일본 스시뷔페는 우리나라 모든 뷔페를 통틀어 가장 비싼 가격인데도 불구하고, 점심시간인데도 문정성시 대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어디서나 쉽게 맛볼 수 있는 일식뷔페 효시가 된 것이다.

당시 국내에 내 노라 하는 주방장들은 반드시 이 호텔을 다녀갔고, 일본에서도 유명 주방장들이 건너와 저에게 요리를 배워 갔을 정도였다.

‘김현룡’ 교수가 이건수 총괄국장에게 세계 최초로 '스시뷔페 상용화' 과정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 왜 ‘조리사’가 되고 싶었는지?

저는 명성있는 포항제철공고를 다녔는데 그때만 해도 3학년에 바로 유명한 철강회사, 좋은 부서에 취업이 됐다.

그런데 저에게는 웬일인지 집중도 안 되고 적응하기 힘들었다. 어느 날 여행 중에 ‘요리학원’ 간판을 보고 요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빠지게 됐다. 

물론 주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반대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몇 달을 고민하다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교육자인 아버님께 대학 진학 공부를 해야겠다고 거짓 말씀을 드리고, 등록금을 받아 무작정 서울 수도요리학원에 등록했다.

그래서 자격증을 따고 집에 갔더니만 ‘우리 집 안에 너 같은 자식은 필요없다. 이 직업을 가지려면 호적을 파서 나가라’ 고 단호하게 조리사 직업을 반대하셨다.

그 당시만 해도 남자 요리사는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3년 반을 집에 못 들어갔다.

그때 생각이 내가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서 누구에게나 내 놓을 수 있는 떳떳한 요리를 잘 할 수 있을 때 부모님을 찾아가야만 용서를 받지 않을까 해서, 3년 반 동안 정말 하루에 2~3시간만 자고, 남들보다 월등하게 많은 시간을 기술 배우는 것에 집중했다.

광화문에서 '비빔밥 행사' 내빈 기념 사진

드디어 1980년 호텔 총주방장이라는 꿈을 위해 경주조선호텔에 입사했다. 3년 후, 지금도 조선일보가 운영하는 서울 코리아나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이 호텔에는 도쿄의 요정가의 최고의 주방장을 스카웃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혼마구로의 오도로(참치 종류)를 일본에서 직수입해 사용하면서 대한민국 최고의 식당 ‘사가에’라는 호칭이 불러지게 됐다.

이곳에서 새벽부터 마감까지 열심히 일했다. 그 결과 일본의 유명 요리사들로부터 레시피 및 기술 등을 전수받았다. 

일본인 주방장이 모국으로 돌아가면서 나에게 29세의 나이로 최연소 수장(서열 세번째 위치)이라는 큰 자리에 올라가게 됐다.

- 김 교수가 느끼는 ‘요리’의 매력은?

요리가 좋아서 그런지 아무리 장시간 요리를 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았다. 저한테는 요리사 직업이 천직이라 생각된다.

회사에 있을 때는 동료들이 몇 시간 일찍 출근하고, 밤늦도록 퇴근을 잘 안 하니까 굉장히 힘들어 했다.

저는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요리는 절대 내놓지 않았다. 항상 점검하고, 준비하고, 또 점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힘들어 했던 동료들이 다 잘 되고 있으니까 지금은 감사하게 생각들 하고 있다.

예전에는 모는 분야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수작업이었다면, 현재는 기계화 작업이 많이 이루어져 있어 빠르게 기술이 변화하면서 다양화 됐다. 그러나 조리는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는 있지만 역시 손으로 해야만 깊은 맛과 심오한 멋을 느낄 수 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첨단산업화가 된다 해도 요리는 기계가 할 수 없고, 오로지 머리와 손, 그리고 인내가 필요한 직업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충청북도 '학교급식조리사' 연수교육 지도 모습

- 최근 청소년들에게 ‘조리사’가 인기직업 상위권이다. 그때와 비교해 본다면?

인식이 좋아졌다는 점에서는 솔직히 기쁜 마음이 앞선다. 현재 해외인턴제나 매스컴을 통해 조명되고 있는 직업 중에 하나로 꼽히고 있고, 글로벌화 되면서 외식 시장도 굉장히 발전돼 가는 것에 영향이 큰 거 같다.

현대는 다양한 요리의 세상이 듯 최근 조리사를 꿈꾸는 청소년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을 정도로, 이제 조리사는 인기 직종이 됐다.

이미 많은 대학에도 조리 관련 학과들이 개설되어 있고, 학생들의 지원도 높다. 조리사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

제가 요리사 할 당시 위상을 비교해 본다면, 결혼을 하기 위해 처갓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직업이 조리사라는 말에 ‘직업을 바꾸고 난 다음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 당시는 사회적으로 조리사라는 직업은 최하위 순이었다고 기억된다. 그러나 저에게는 최고의 직업이었고, 현재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조리사’로서 직분에 충실하고 있다.

경북 '울진대게축제' 요리 시연

- 지금은 강단에서 후학 양성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조리고등학교 교감선생님이 찾아 오셔서 강의를 부탁했다. 회사에 매인 몸이라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없어 사장님께 말씀 드렸더니 ‘굉장히 좋은 기회다. 호텔 홍보도 되고, 공부도 될 테니까 해 보라’는 권유가 있어 시작한 것이 계기가 돼, 7년간 조리고등학교와 대학교 외부 강의를 하게 됐다.

2004년부터 경주대학교에서 후학 양성을 위해 강단에 서게 됐고, 위덕대학교 교수를 거쳐 2013년 3월 청주 서원대학교로 임용됐다.

강의를 다니다보니, 욕심이 생겨 뒤늦게 또 다른 공부를 시작해, 40대 후반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직장생활하면서 공부까지 하려니까 나름대로 고생을 많이 했다. 중간에 그만둘까 생각도 많았다.

한식의 날, 호텔외식조리학과 학생들과 광화문광장 세종대왕동상 앞에서

서원대학교에 부임하여 다음해 외식산업학과가 호텔외식조리학과로 학과명칭 변경이 되고, 우리나라 최고 시설을 자랑하는 실습실도 마련됐다. 그러면서 엄격하고 철저한 현장 실습을 통해 제자들을 교육시켰다.

제가 부임할 때는 호텔외식조리학과가 정식과목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관심있는 학생들은 스터디 형식으로 지도했다. 학생들도 도움이 컸다.

많은 학생들을 다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에 스터디하면서 좀 더 열심히 하는 학생들에게는 밤늦게까지 지도했다. 열심히 배운 학생들이 옆에 있는 학생들에게 또 서로 도와가며 지도도 하고 해서, 학생들 스스로가 보람을 느끼게 됐다.

그 결과, 제자들이 각종 대회에 출전해서 1년에 2~3번씩 장관상을 수상하는 것은 기본으로, 각종 상을 휩쓸다시피 성적들이 일취월장했다.

그러다 보니 정원 1백명 모집에 항상 초과지원 양상을 보여, 서원대 단일과 규모로서는 제일 클 정도로 ‘인기있는 학과’로 성장했다.

탑 그랑프리대회 전체 '최우수상' 기념 찰영(맨 오른쪽 김현룡 교수)

- 교육현장에서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제가 강조했던 것은 졸업 후 바로 현장에서 업무를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항상 먼저 직접 시범을 보이고 나서 기초요리를 늘 강조했다. 

기초조리만 탄탄해도 바로 현장에서 일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기초조리는 매우 중요하다

학생 선발 과정에서도 단순히 지원자를 성적순으로 선별하는 게 아니라, 수험생들의 면접을 강화해 그들의 의지와 끼를 우선시 해 선발했다. 수업도 새벽이나 밤늦게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또한, 졸업과 동시에 전원 취업이나 창업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실습과 이론을 공부시켰다. 졸업 전 1인 2자격증 이상 취득하도록 적극 독려했다.

지금은 조리를 전공하고 취업하면 고졸, 대졸 구분이 없고 고졸이든, 대졸이든 대부분 학생은 기능사 자격증을 우선적으로 취득한다. 기능사 자격증 있어야 취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정받는 조리사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습이다. 조리 실력은 충분한 실습과 끊임없는 노력이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실습시간에 학생들과 실습 평가를 하고 있는 '김현룡' 교수

- 일식조리 전문가이지만 ‘한식’에도 관심이 많은지?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요리가 ‘한식’이다. 한류열풍으로 세계 어딜 가든 맛 볼 수 있고 고가이다. 제 전공이 일본요리지만 한식은 기본으로 생각하고 다른 요리를 공부한다.

서원대로 오기 전에 경주대학교에 있을 때 경주시에서 하는 요리 프로젝트 세 가지를 담당한 적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요리스토리텔링으로 우리나라 요리들은 이야기꺼리가 많이 있다.

전복 간장양념 구이요리

예컨대 경주 포석정(鮑石亭)에 포자가 전복 포(鮑)자이다. 포석정 모형 자체가 전복모양이다. 신라시대 때부터 경주에 전복이 유명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요리가 오래전부터 쭉 내려 왔다. 가장 전복 식재료로 좋은 것이 감포바다 내 척사리라는 곳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황경복이 생산되고 있다.

이 식재료를 가지고 조리를 하다보면 세계 어느 나라 식재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감칠맛과 전복의 모든 맛을 느낄 수 있다. 한식 개발은 무궁무진하다

- 향후, 추진하고 싶은 목표는?

‘조리사관기술대학’을 만들어 학교 교육과 현장실무가 일원화해, 졸업 후 현장 실무에 원활하게 조리기술이 적용해, 현장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 있게 일할 수 있는 ‘조리의 중간간부’를 배출해 내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기업에서 말하는 중간간부와 오너세프를 배출하기 위해, 현장실무 중심교육을 목표로 삼고 있다. 중간간부는 취업 후 최소한 5년에서 10년 지나야 가능하지만, 우리 학교에서 교육과정을 철저히 따르면 빠른 시간 내에 중간간부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현장이든, 어딜 가든 처음부터 다시 배우게 되는 교육 모순이 이어지고 있어 안타깝다. ‘어떻게 하면 중간간부로 갈 수 있는 길을 터 줄까’ 해서 제 나름 20여년 현장에 있으면서 겪어 왔던 부분들을 새로운 교과목과 이론적인 부분을 탄탄하게 체계화 시킬 계획이다.

여기에다, 4년 동안 현장 교육을 철저하게, 고등학교보다 더 힘든 수업을 거치게 해서 졸업하면 정말로 ‘보람있고, 의미있는 졸업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후학 양성을 계획하고 있다.

스스로가 최고의 경영 마인드를 갖고 내 작품이 ‘정말 예술이다’라고 느낄 정도로 본인들이 자기요리에 만족을 갖고 졸업한다면, 사회에 나가서도 좋은 날개를 마음껏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가 서원대로 옮긴 이유도 순전히 학교가 제시해준 미래의 비전 때문이었다. 평생 신기술의 서비스센터가 될 수 있도록 뒤에서 뒷받침 해주고 싶은 바람이다.

향후, 동료들과의 신뢰와 대학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저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지역의 먹거리 메뉴개발을 위해 호텔세끼1회 참가선수들과 기념 사진

- 건강관리는?

대부분 유명 조리사가 남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들기 때문에 건강관리는 중요하다. 

매끼마다 잘 챙겨먹고 있고, 가급적이면 제철음식도 찾아 먹고 한다. 여름이면 장어 생각이 나는데 똑같은 장어라도 제철인 여름과 겨울에 구워보면 양이 줄어든다. 그만큼 제철 음식과 아닌 음식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또한, 가끔 시간이 허락되면 혼자 산행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학교생활이 20대들과 동행이라 힘들 때면 산행을 더욱 강하게 하면서 체력을 다지곤 한다.

흥덕고등학교 학생들이 지난 23일, 호텔외식조리학과 '김현룡' 지도교수(가운데)의 전공체험 프로그램 ‘조리 실습’을 체험하고 있다.

- 끝으로 한 말씀.

남의 혀끝을 만족시키는 직업 조리사는 상당히 어려운 직업이다. 혀를 만족하기 위해서는 재료에서부터 모든 것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하듯이 정성과 열정, 사랑을 담아 요리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청주와의 좋은 인연을 지역 사회에 많은 도움이 되도록 재능 기부를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본조리의 기술과 관련해 소스의 자문이 필요하신 분들에게는 도움이 많이 되도록 힘써 보겠다.

이건수 기자 geonba@kn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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