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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서 현란한 미려한 예술 같은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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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서 현란한 미려한 예술 같은 사기”
  • 최형선 칼럼니스트
  • 승인 2012.02.23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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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비극’

“이처럼 다이아몬드 하나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듯, 양심을 버리고 사리사욕을 좇게 되면 엄청난 문제가 발생한다.”

[KNS뉴스통신/칼럼] 인도에서 9세기에 블루호프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을 때 이것의 원석은 무척 커서 112캐럿에 달했다. 하지만 이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이것을 발견한 농부와 다이아몬드에 대한 소문은 금세 퍼졌고 인도를 침입한 페르시아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이를 지키려다 농부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것을 빼앗은 페르시아군의 장군은 국왕인 사제황에게 이것을 바쳤다. 그러나 사제황은 반역자들에게 처참히 살해되고 말았다.

그 뒤 이 다이아몬드는 무굴제국의 황제인 아우랑그제이브가 소유했다가 프랑스의 여행가인 타베르니에에게 건네졌고 그는 이 다이아몬드를 태양왕 루이14세에게 바쳤다. 대가로 엄청난 금화를 받은 그는 재산을 다 탕진하더니 여행 중 모스크바에서 살해당했다.

루이14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고 다이아몬드를 빌렸던 몬테스판 부인도 거듭된 불행 속에서 몰락했고 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것을 물려받은 루이16세도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에서 죽었다. 그 후 이 다이아몬드는 2개로 분할되었는데 이것을 나눈 보석 연마사의 아들이 다이아몬드를 팔았다가 미쳐 버렸고 그것을 구입한 남자는 고기덩어리가 목에 걸려 질식사했다.

이 다이아몬드를 입수한 실업가 엘리어슨은 낙마로 죽었고 이것을 사들인 런던의 부호 헨리호프의 집안도 파산했다. 1911년에 이것을 구입한 워싱턴 포스트지의 사주 마크린가의 장남도 교통사고로 죽었고 장녀는 병사했으며 사주인 마크린마저 미쳐서 죽었다.

그 후 이것을 손에 넣은 보석상 윈스트레는 저주를 비웃다가 교통사고를 네 번이나 당한 후 파산직전까지 갔다. 이 보석은 다시 영국의 은행가 헨리 필립 호프에게 넘어갔고 호프가는 결국 몰락했다.
이 다이아몬드는 그 후로도 숱한 화제를 낳다가 1958년 마지막 소장자가 스미스소니언에 기증함으로써 운명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처럼 다이아몬드 하나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듯 인간이 물질에 눈이 멀어 치우치게 되면 문제가 싹트게 되는 법이다. 인간이 또 양심을 버리고 사리사욕을 좇게 되면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신문을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신문을 빨리 훑어보는 편이다. 정치 문제에 대한 투명성은 우파 메이저 신문들이 문제를 안고 있지만 문장의 스타일은 정말 나무랄 데 없이 유려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최근에는 질 떨어지는 신입기자들도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이들 신문은 다채롭고 지식적으로 유익한 테마를 많이 제공하지만 여론 플레이를 하기 때문에 대중의 비난을 사고 있다. 신문은 사건의 사실을 그대로 전달할 의무를 가지지만 사견을 가지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최근 이들 신문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양심을 버리는 기자 정신은 혼을 버리는 것과도 같다. 편중되지 않고 고른 보도의 자세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양심을 버린 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안다면 그들 스스로 여론을 형성하는 엘리트란 의식을 버려야 할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면서 소재를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구성을 하느냐에 따라 상대를 얼마든지 속일 수도 있고 좌지우지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얼마든지 글로 예술적인 사기를 칠 수 있는 기술을 우리는 보유하고 있다. 이기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양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치우친 자들에게 망한다는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 근처 버지니아주 랭글리에는 CIA(미국 중앙정보국) 본부가 있다. 이 기관은 1947년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창설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승패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일본의 진주만 침공과 같은 사건이 다시 재발되지 않도록 하자는 반성을 했고 그 결과 정보기관을 한 곳으로 통합한 것이 바로 CIA였다.

CIA는 냉전시대 소련 KGB와 함께 배후 정보전쟁을 담당했다. 그러나 60년 대 쿠바 피그만 상륙작전 배후 조종과 마피아를 동원한 카스트로 암살 작전 전모가 드러나면서 민심을 잃기 시작했고 75년 사이공 함락으로 인해 그 치부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결국 CIA는 정치첩보에서 경제첩보로 전환하게 되었고 냉전 후 테러조직과 마약조직 색출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CIA에 대한 세계의 시선이 곱지 못한 것은 바로 그들이 여론을 조작하고 목적을 위해 비열한 방법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숨길 수 없는 과거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역사는 반드시 그것을 밝혀내고 심판을 해왔다. 이기기 위해 치우쳐서 양심을 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 최형선 프로필

- 現 visionic 컨설턴트
- tecoion 컨설턴트 / 강사
- ‘영문 technical writting 지침서’ 집필
- isis korea 번역 및 리뷰 담당
- ‘tesco design center’ technical writer역임
- brooks automation software technical writer 역임
- 臺灣, 日本, 싱가폴, 한국서 시스템통합(si) 프로젝트
- 하이닉스(hynix) 반도체 자동화 프로젝트 수행

최형선 칼럼니스트 jlist@kn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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