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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권 대표 문화담론] ‘창의적인 배움’은 인간 최고의 희열(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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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권 대표 문화담론] ‘창의적인 배움’은 인간 최고의 희열(悅)
  • 이인권 논설위원단장
  • 승인 2018.10.2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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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것은 아름다운 것”… 지력(智力)을 생성하는 참능력 필요
이인권 KNS뉴스통신 논설위원단장

지난 9월 4일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제 75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 <복스 럭스>(Vox Lux) 프리미어 행사에 할리우드 배우 나탈리 포트만이 참석했다. <복스 럭스>는 뮤지컬 영화로 그녀가 공동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다. 이스라엘 출신으로 폭넓은 연기를 통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 남다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그녀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공부를 썩 좋아하지 않아요. 공부를 싫어해요. 하지만 배우는 건 좋아해요. 배운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니까요.” 이스라엘 출신이라 유대인의 전통에 익숙해서일까. 유대인의 성전 탈무드에서는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 그래서 인생의 전체를 끊임없이 배우는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유대인들은 젊음을 배우는 자세를 기준으로 해 규정짓는다. 나이가 들어도 계속 배우는 열정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을 청춘이라 한다. 심지어 그들은 배우는 것을 거룩한 의무라고 생각해 평생 배움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지성’ 이라고 믿는데 이것은 지식보다도 지혜를 바탕으로 한다. 지식을 지혜를 갈고 닦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지혜가 없으면 그것은 많은 책을 등에 짊어진 당나귀와 다를 바 없다고 비유하기도 한다.

유명 배우 나탈리 포트만도 싫어한 ‘공부’는 아마 누구에게나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공부라는 게 전제가 되면 보편적으로 그것은 능동적이기 보다는 수동적이게 된다. 또 적극적이기 보다는 소극적이게 된다. 어쨌든 공부라는 말은 우리에게 일종의 부담감이나 압박감과 같은 어감을 내포하고 있다.

“공부 좀 해라”, “공부해야 출세 한다”, “공부해서 남주냐” 등등… 한국 사람이라면 어릴 때부터, 또 학생 시절 내내 세뇌가 되도록 귀가 따갑게 들어온 얘기다. 그래서 공부라는 말 자체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의 잔소리로 우리 두뇌에 입력되어 있을 정도다.

이제는 공부라는 말에 반응이 무뎌지자 ‘즐공’(즐겁게 공부하기)이나 ‘열공’(열심히 공부하기)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사실 공부라는 말을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그리 달가운 말이 아니다. 한국어로는 ‘공부’(工夫), 한문으로는 ‘학습’(學習), 일본어로는 ‘벤교’(勉强), 영어로는 ’study'이다.

우리말의 공부는 불교의 ‘주공부’(做工夫)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것은 참선(參禪)에 진력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러면 ‘간절하게 딴 생각 없이 오로지 몰입하는 경지로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공부는 도(道)를 닦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뜻일 거다. 그러니 그 뜻대로 공부를 한다면 공부는 취미나 재미가 될래야 절대 될 수가 없다.

영어 ‘study'는 라틴어의 ’studium'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어원을 살펴보면 '간절함‘(eagerness), ’근면한‘(diligent)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밀고 나아가다’(to press forward), '밀어붙이다‘(to push), '물리치다’(to beat)와 같은 뜻도 담겨져 있다. 일본어의 ’벤교‘는 오히려 영어의 원어에 충실하게 ’勉‘(근면한)과 ’强‘(밀어붙이는)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보면 한문의 ‘배워 익힌다’는 의미의 ‘學習’은 한국어, 일본어, 영어의 의미론과는 조금 다르다. ‘배우고 익히는 것’을 그들은 기쁨으로 접근했다. 그래서 공자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라 해서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공자는 배우는 것을 ‘단순한 즐거움’(樂) 수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쁨’(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공부라는 말은 힘들고 따분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 공부라 하면 우리의 현재의식은 듣는 순간부터 그것을 힘겨운 상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에서 학생들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을 것이다. 암기와 시험이 기반이 된 공부를 통해서는 획일화되고 박제된 ‘지식보유자’만 양성하게 된다.

한국처럼 근대화가 늦었던 사회발전의 초기 단계에서는 우선 지식의 힘이 컸다. 달리 말해 공부가 통했던 과거 시대다. 하지만 그 차원을 넘어 혁신의 변화무쌍한 세상에 들어서서는 지식만으로는 더 이상 진보를 이루는 것이 한계점에 다다라 있다.

혁신시대에는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지식과 기술의 발견과 융합을 통해 새로운 ‘지력’(智力)을 생성하는 참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상황에서 ‘창의성’이 핵심역량이 되는 것이다. 창의적 교육이 절실한 이유다.

그래서 타의적이고 맹목적인 지식 습득의 공부가 아닌 자율적이고 지속적이며 희열(悅)을 느끼는 ‘배움’의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학습 곧 ‘배워 실천하는 것’, 그것은 공자의 말대로 개인적으로는 기쁨을 주는 일이며 사회적으로는 미래를 여는 길이다.

창의성은 인간만이 누리는 차별화된 특수성으로 이를 통해 인류의 문명이 발달되고 문화가 형성되어 왔다. 매슬로우의 <인간욕구론>에 따르면 가장 상위의 욕구는 자아실현인데 이는 창조적인 행위에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인간은 강한 성공감과 생명력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공자는 2,500년 전에 배움의 희열을 말했는데 그것은 창의적인 배움을 일컫는 것이었으리라. 어쨌든 할리우드 배우의 말대로 ‘배우는 것은 아름다운 것’(Learning is beautiful)이다.

이인권 논설위원단장 success-ceo@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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