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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의 以言傳心] 거버넌스? 여야소통정치? 연정(聯政)? … ‘협치(協治)’의 진정한 의미 곱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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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의 以言傳心] 거버넌스? 여야소통정치? 연정(聯政)? … ‘협치(協治)’의 진정한 의미 곱씹기
  • 이재광 논설위원ㆍ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승인 2018.09.05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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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치 무대에 ‘협치(協治)’란 단어의 등장횟수가 늘고 있다. 주로 여야가 소통을 통해 정치를 잘 하자는 ‘소통정치’의 의미로 쓰이는데, 일부는 야당이 정부 내각에 참여하는 ‘연정(聯政)’의 의미를 더 적극적인 협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곱씹어 보자. ‘협치’는 본래 그런 뜻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본래 무슨 뜻으로 쓰였던 것일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한민국의 언어사용법이 곤혹스럽기만 하다.

일단 알아둬야 할 게 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협치’란 단어는 없다는 것이다. 아직은 새로운 단어이며,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표준어(標準語)’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국어연구원 관계자는 “수시로 표준어를 제정, 발표한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은 비(非)표준어 ‘협치’도 언제든 ‘표준어’의 자리를 꿰찰 수 있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 같다. 왜냐, 이 말 안에는 앞서 말한 것과 전혀 다른, 심지어 정반대일 수도 있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 ‘거버넌스’의 일본 번역어 ‘협치’

무슨 얘기냐고? 이 단어 ‘협치’의 기원을 알아보며 그 답을 찾아보자.

먼저 대한민국 대표 포털 네이버 뉴스에서 ‘협치’란 단어를 검색해 보라. 네이버를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겠으나 대략의 기원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검색해 본 결과, 이 단어가 쓰인 가장 오래된 기사는 2000년 1월 작성된 것으로, 21세기를 맞아 일본 각계각층의 민간인으로 구성된 ‘21세기 일본 구상간담회’라는 조직이 펴낸 정책 보고서 <일본의 프론티어는 일본 내에 있다: 자립과 협치로 이룩하는 신세기>에 대한 것이다.

이제 이 보고서 원문을 찾아보자. 어렵지 않다. 일본 내에서는 꽤나 유명한 보고서인지 일본 포털 몇몇을 검색해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협치’는 이 보고서 1장 3절에 집중 언급돼 있다. 그런데 신기하다. 이 단어가 외래어 표기인 가다가나의 뒤에 괄호로 표기돼 있는 것 아닌가. 결국 일본에서 ‘협치’란 특정 외래어를 일본어로 번역한 ‘번역어’란 뜻이다. 그리고 그 번역어의 원문은 ‘가바난스(ガバナンス)’로 돼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일본에서 ‘협치’란 단어는 영어 ‘거버넌스(Governance)’의 번역어로 새롭게 조어(造語)된 단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고서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겠다.

“세계화, 정보화, 다양화 속에서 정책은 다양화, 복잡화되고 최적의 정책을 찾아내기가 어려워진다. 또한 인간의 이해관계는 쉽게 대립하게 되고 공공을 둘러싼 합의의 형성도 곤란해진다. 이 같은 곤란을 넘어서고 개인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협동하는 정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시대에 걸 맞는 규칙과 열린 조직이 필요하다. 새로운 ‘거버넌스(협치)’가 불가결(不可缺)한 것이다.”

결론. 우리말 ‘협치’는 영어 거버넌스의 일본어 번역어인 ‘교치(ぎょうち)’의 한자어를 우리식 한자발음으로 읽어 표기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의 근거는 ①네이버 포털에서 ‘협치’란 단어가 쓰인 가장 오래된 기사를 찾아보니 ②그 기사가 일본의 한 보고서에서 나온 것이며 ③그 보고서 원문을 본 결과 ④보고서는 ‘협치’란 단어를 영어 '거버넌스'의 번역어로 쓰고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 우리나라 표준어 사전에는 없는 이 ‘협치’라는 단어는, 영어 ‘거버넌스’의 번역어로, 일본에서 쓰이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다. 당연히 우리나라에서도 이 단어는, 필자가 아는 한 거의 전적으로, 거버넌스란 의미로만 쓰였다. 그리고 2018년 현재 이 단어는, 단어의 의미가 바뀌어 가고 있는 ‘어의전성(語義轉成)’의 기간을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네이버로 돌아가 2000년대 및 2010년 대 초ㆍ중반의 기사를 훑어보라. 필자의 말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 ‘거버넌스’의 중심에는 ‘시민’이 있다!

사실 필자에게, 이를 확인하기 위해 굳이 네이버 기사를 검색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진작부터 ‘협치’가 ‘거버넌스’의 번역어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필자는 한창 행정학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논문 주제는 바로 ‘거버넌스’였고, 당시 몇몇 주변인들로부터 ‘거버넌스’라는 단어 대신 한국 및 일본의 번역어인 ‘협치’란 말을 쓰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때만 해도 ‘협치’란 단어는 당연히 ‘거버넌스만'을 뜻했다. 다른 의미는 없었다.

많은 경우 외국어를 본래 단어 그대로 쓰기보다는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는 게 쓰기 쉽고 이해하기 편하다. 필자 역시 ‘거버넌스’ 대신 ‘협치’라는 번역어를 쓸까 고민해 봤다. 하지만 마뜩치가 않았다. ‘협치’라는 번역어에 있는 ‘다스린다’는 의미의 ‘치(治)’가 자칫 ‘거버넌스’가 갖는 원래의 의미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필자는 번역어 ‘협치’ 대신 원어 ‘거버넌스’를 그대로 쓰기로 했다.

거버넌스는 1990년대, 서슬 시퍼런 절대 권력의 ‘거버먼트(Government) 시대’에 조종(弔鐘)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며 새 시대 정부(및 국가)에 맞는 새로운 국가권력 운용방식에 붙여진 이름이다. “거버넌트에서 거버넌스로!”라는 구호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절대성’ 대신 ‘상대성’을, 정통에 대한 고착보다는 해체를 강조하던 포스트모던 열기가 불면서 이 단어는 금시 세계적인 유행어가 돼 버렸다. 이 유행에 힘입어서였는지 거버넌스에 대한 추구는 좌우도 따로 없었다.

하지만 유행어는 의미가 애매해지기 마련이다. ‘거버넌스’도 마찬가지. 어떤 학자는 “쓰는 이마다 의미가 다를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의 정리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2007년 박사논문(경희대 행정학)과 관련 논문, 그리고 졸저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삼성경제연구소, 2010년)를 통해 거버넌스와 관련해 몇 가지 일관된 논지를 펼쳤다.

즉, 거버넌스란 ①주로 시민사회의 강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②우파에서는 주로 고객지향 행정과 탈관료화를, 좌파에서는 시민의 정책참여를 강조하고 있으나 ③이 세 가지 내용을 함께 고려해야 거버넌스의 실체가 드러날 수 있으며 ④그 ‘실체’의 배경에는 다름 아닌 ‘과잉생산경제’가 자리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필자는 이런 논지로 거버넌스를 ‘과잉생산경제에 대한 정부조직(또는 국가)의 대응양식’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곧 과잉생산경제에 따른 시민의 권력 강화와 그에 따른 정부를 포함한 광범위한 개념으로서의 국가의 권력 약화 및 시민의 정책참여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의 권력 강화 및 정책참여, 국가의 권력 약화가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답은 바로 나온다. 전통적으로 ‘치자(治者)’였던 정부ㆍ국가와 전통적으로 ‘피치자(被治者)’였던 시민과의 동등성 또는 권력의 배분이다. 궁극적으로 거버넌스란, 치자와 피치자가 동등한, 그리하여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또한 그리하여 국가와 시민이 함께 정책을 이끌어 가는, 인류 역사 상 초유의 권력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최근 정치권에서 나오는 ‘협치’의 용법은 분명 이와 다르다. 정치인들이 말하는 ‘협치’에 ‘거버넌스’의 핵심인 시민은 없다. 그저 정치권 내 ‘여야의 소통정치’ 정도로만 규정되고 있다. 네이버 ‘오픈사전’에는 ‘(여야가) 힘을 합쳐 잘 다스려 나간다는 의미’라는 풀이도 있다. 어떻게 보면 '시민 없는 협치'요, '시민 없는 거버넌스'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시민단체의 반발이 없다면 그것이 이상할 상황이다. 경기도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지속적으로 ‘여야협치’가 아닌 ‘민관협치’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 한국 문화에 ‘협치’는 맞고 ‘거버넌스’는 틀리다?

요즘 ‘협치’라는 단어의 쓰임새는 이처럼 곤혹스럽다. 일본 언론은, 한국 정치권 관련 기사를 쓰며 이 ‘협치’라는 단어에 괄호로 ‘협력정치’라는 해설을 삽입한다. 일본에서 말하는 ‘거버넌스로서의 협치’가 아니라는 의미다. 다시 고민해 볼 때다. 우리나라에서 ‘협치’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 ①권력자인 여야의 협력 또는 소통정치를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②시민과 기존 권력층과의 대등한 권력관계로서의 ‘거버넌스’를 의미하는 것일까?

아직 ‘협치’라는 단어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내포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미 모두를 아우르기에 ‘협치’라는 단어의 품은 너무 좁다. 추후 어떤 의미로서의 ‘협치’가 표준어로 등재될 수 있을까? 사뭇 궁금하다. 그리고 걱정이 된다. 표준어는 문화를 반영한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관 주도형이야, 국민도 국민을 이끌 강력한 정부를 원해, 서구식 거버넌스는 우리나라에 맞지 않아.... 숱하게 들어온 이런 말들에 내포된 편향된 인식이 우리나라 정치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재광 논설위원ㆍ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이재광 논설위원ㆍ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imu@kn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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