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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용의 시인의 마을(9)- 쌍다리 정류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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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용의 시인의 마을(9)- 쌍다리 정류장에서
  • 시인 성덕용
  • 승인 2012.01.09 15: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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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성덕용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붉은 꽃잎은 바람이 있기 전 부터
말간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 붉은 입술을 벌리게 하였는지
아지 못 하지만
바람이 잠시 머물렀는지
터를 잡고 백무공산(白霧空山)의
허허로운 소리로 울었는지
그도 알지 못하지만

붉은 꽃잎은 오래전 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은 꽃잎의 유혹이라 하며
머물렀고

오월애가(哀歌)

성덕용

새벽 찬바람에
비 오신다
젖은 몸이야 흙에 두면 되겠지만
산마루 안개구름 좇아 오르는
마음엣 그리움은 어데로 갈꼬
동편 높은 산 힘에 부쳐
그 품에 여울로 안기었다가
아리리 가락으로 돌아 올때엔
혹여 님 소식 묻어올거나

 

쌍다리 정류장에서

성덕용

작은 삼거리 정류장 팻말도 없는데
언덕배기에 앞다리 걸친 마을버스

"이번 정류장은 쌍다리입니다."

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내리는 이도 없었다.
외지에서 흘러온 바람만 한숨처럼 빠져 나갔다.
오랜 여행의 끝인지 이제 여행을 시작하려는지
헛손질을 하며 뱅뱅돌이질을 하던 바람은
제 갈길 휑하니 가버린
버스의 매퀘한 연기를 끌어안는다.

갈 곳이 없었다. 할일도 없었다.
그저 생활이란 이름에 떠밀려 나선 길이었다.
힘겨워 하는 교통카드의 경고음을 애써 무시하며
명분을 짓기 시작한다.

"오늘 할일은 이거야, 그래 이게 오늘 할일이야."

신정네거리역에서 까치산역까지,
까치산역에서 광화문역까지 할일 없는 일을 만들었다.
교보문고에 들러 휘황찬란한 책 껍데기를 훔쳐보다가
속살도 가끔 들춰 보다가
스스로 떠밀리듯 밖으로 나서 보지만
저리도 바삐 가는 사람들 틈 속에서
제자리만 헛도는 발걸음

"가자, 가자, 어디든 가자."

바닥에 누운 그림자를 좇아 내딛는다.
벤취에 누운 사람들 곁을 지나
정지선 앞 시위하는 차량들도 뒤로 하고
인사동 입구에서 흔들리던 눈빛을 닫은 채
안국동으로 접어든다.
잠시 쉬어가자. 동굴 같은, 무덤 같은 지하벙커로 길을 잡는다.
아무런 색깔도 없는 눈빛과 아무런 느낌도 없는 음성에게 인사를 한다.
찻잔을 내어민다.

"물이나 한 잔 마시자."

낯설다, 이럴 때는 온갖 것들이 낯설다.
할일 없을 때 세상은 낯설어지나 보다.
인사조차도 낯설어 그냥 동굴 밖으로 나선다.
이제는 잠시 발길 멈출 곳조차 없는 곳으로 간다.
발길이 멈추면 눈물이 나는 곳
발길이 멈추면 오랜 흔적들이 여기저기서 달려오는 곳
그래서 발걸음이 공연히 빨라지는 곳
앞모습이 눈에 들기도 전에 뒷모습만 길게 남겨둬야 하는 곳
충무로.
날갯짓하는 자들과 부러진 날개를 부둥켜안고 절름거리는 자들이
오랜 인연을 눈빛으로 인사하는 곳이다.
서로의 눈빛을 보며 최면을 거는 곳이다.

"삼선교로 와."
"삼선교 6번 출구로 나와서 마을버스를 타, 1번 버스는 타지 말고..."

쌍다리 정류장에 내려서 전화하란다.
그는 아직 희망을 얘기하지 않았다.

"이번 정류장은 쌍다리입니다."
 

시인 성덕용 jlist@kn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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