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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민주당 대전시장 경선 후보 심층 해부-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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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민주당 대전시장 경선 후보 심층 해부-분석
  • 조영민 기자
  • 승인 2018.04.0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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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S뉴스통신=조영민 기자] 6·13 지방선거를 향해 각 정당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대전은 더불어민주당 당내 경쟁이 어느 곳보다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이다. 대전시장만 해도 박영순, 이상민, 허태정 후보 간 3파전으로 치러진다. 서구를 제외하곤 4개 구청장 후보 자리를 놓고 3~4명이 경합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의 대전시장 경선은 오는 11~13일 진행된다. 구청장과 지방의원 경선 일정도 곧 확정될 예정이다. 경선 열기 또한 뜨겁게 달아오르는 중이다. 이에 따라 유권자의 올바른 선택을 돕기 위해 우선 더불어민주당 대전시장 예비후보들을 집중탐구한다.

-----------------------------------------------------------<편집자 주>

민주당은 애당초 지방선거 공천에 ‘靑 7대 인사 배제 원칙’ 적용을 검토했었다. 청와대의 고위공직후보자 7대 인사검증 기준은 ▲병역 면탈 ▲세금 탈루 ▲불법적 재산증식 ▲위장전입 ▲논문 표절 등 연구 부정행위 ▲음주 운전 ▲성 관련 범죄 등이다. 청와대는 이중 하나라도 해당이 되면 임용을 원천 배제하기로 했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 역시 6·13 지방선거 공천에서 청와대의 ‘고위공직자 임명 7대 배제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물론 이보다 더 강화된 도덕성 평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놨었다. 민주당이 실력과 도덕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선출할 때 국민들도 더 많은 지지를 보내줄 것은 자명한 일이다.

◇ 이상민 국회의원, “대전시장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이상민 의원을 ‘소아마비 장애를 딛고 일어선 오뚝이’,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라고 표현한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의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 장애를 얻게 됐다. 생후 6개월 때 소아마비에 걸려 지체장애 3급 판정을 받은 장애인이다. 몸이 불편하다 보니 선거운동을 할 때도 앉아 있다가 얼른 일어나서 인사하지 못해 건방지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나이는 60살. 1958년 1월 22일 대전에서 출생했다. 2남 1녀를 두고 있다. 이 중 막내딸을 국회의원 당선 직후 47세에 보았다고 한다. 1970년 대전 신흥초등학교, 1973년 대전중학교, 1976년 충남고등학교, 1980년 충남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학교 다닐 때 가수가 꿈이었다. 음악을 좋아한 그는 충남고에 입학해 대전지역 남녀 학생 연합서클인 ‘목요음악회’라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1학년이 끝날 무렵 그의 부친이 대학 진학 계획에 대해 묻자 그는 “음대 성악과에 가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1992년 제34회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로 활동 했다. 사법시험 준비를 거의 10년 정도를 하다가 고시에 합격했는데, 심지어 이의원의 선친은 늘 “상민이는 공부하거라” 하면서 제사 때도 참석하지 말 것을 종용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상민 의원의 부친인 고 이일우 선생은 대전중·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생전에 이상민 의원의 교육에 남다른 정성을 보였다. 이일우 선생은 평소 친구였던 박규태 전 대전시 노인회장의 아들인 박성효 전 대전시장이 이상민 의원보다 앞서가면 이 의원을 나무랐다고 전한다.

# 송석찬 전 국회의원과 모진 인연

이의원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간판으로 유성에서 당선된 이후 2016년 20대 총선까지 내리 4선을 기록했다. 그런데 사실 17대 총선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폭풍 때문에,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출마자들에게 무척 유리한 환경이었다. 이 덕분에 정치 신인이었던 이상민 의원은 강력한 다크호스였던 무소속 이병령 후보를 1203표차로 꺾고 32% 득표율로 신승해 어렵게 초선 의원이 될 수 있었다.

당시 대전 동구의 선병렬, 중구의 권선택, 서구을 구논회 등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열린우리당 후보들이 휩쓸었다. 이때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반대 열풍을 업고 얼결에 국회의원이 된 사람을 이르는 ‘탄돌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이상민 의원은 당초 통합민주당의 공천에서 탈락했다. 그러다가 자유선진당에 입당하여 출마해 당선됐다. 충청권에 이회창·심대평 바람이 불었을 때였다. 그리고 2012년 총선에서 이상민은 선거 직전 다시 민주통합당으로 복귀, 출마해 당선됐다.

이상민 의원에 공천에서 밀리자 민주통합당을 탈당해 이회창 총재가 이끄는 자유선진당으로 출마한 송석찬 전 의원과 불과 몇 달 만에 서로 소속 정당을 맞바꿔 대결해 승리했다. 즉 후보는 같은데 당이 바뀐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송석찬은 민주당 경선에서 패배하자 자유선진당으로 왔고, 자유선진당은 어차피 후보가 없으니까 옳다구나 하고 받은 것. 결국 이상민 의원이 다시 승리했다.

사실 그전부터도 이상민의원은 자유선진당과 안 맞는 사람이라는 평이 많았다. 보수 성향의 정당에서 혼자 당 방침에 반대하고 진보적 법안에 찬성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같은 열린우리당 출신인 권선택이 특별히 튀지 않았던 모습을 보인 것과는 반대되는 모습을 견지했다.

# ‘정의의 호빵맨’ 이상민

이상민의원은 2014년 5월부터 2016년 5월 19대 국회 임기 끝까지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런데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의 포괄적 적용을 반대했다. 2015년 1월 법제사법위원회 전체 회의에 상정하지 않아 입법을 지연시켰다. 당론과 다르게 김영란법 전면 개정을 주장하면서 ‘정의의 호빵맨’이란 별명을 받았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으로 출마해 3선 대전교육감 출신 김신호후보를 꺾고 당선 되면서 4선 의원이 됐다.

이상민 국회의원 부인은 공식 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의원이 통합민주당의 공천에서 탈락되었을 때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상민 의원은 “(공천 탈락 소식을 받은 다음에) 우선 집사람과 어머님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님은 “절대 큰소리 내지 마라"고 말씀하시고, 우리 집사람은 낙담하고 실망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 안 해 본거 한번 바람으로 된 것, 바람처럼 떨어져 잘 됐다”고 하면서, “빨리 변호사 개업 준비나 하라”고 말했다.” 이상민 의원은 “어머니나 우리 집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충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구나”라고 밝혔다. 이의원의 부인이나 어머니도 본인처럼 큰 충격을 받았겠지만, 아마 이의원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 과연 이상민 의원은 한국의 루스벨트가 될 것인가?

이상민 의원은 대전시장 출마를 본격화면서 ‘한국의 루스벨트! 이상민’을 내걸었다. 장애를 극복하고 미국 대통령에 오른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통해 자신도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대전시장으로서 충분한 역량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19대 대선 민주당 경선에선 안희정 충남지사에게 기울지 않고 중립을 지킨 바 있다. 이상민 의원이 비문(비문재인)계와 장애를 딛고, 그의 소망인 대전시장에 당선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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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태정, 꽃길만 걸을 수 있을까?

지난 2월 12일 허태정은 퇴임식을 갖고 8년을 보낸 유성구청을 떠났다. 퇴임식장에 걸린 대형 현수막에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이날 행사에는 허 후보의 정치적 동지인 조승래 국회의원이 참석해 허 후보의 앞날을 축원했다.

허태정은 조승래 국회의원과 더불어 대전시의 대표적인 친안희정계 정치인 중 한 명이다. 1965년,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에서 태어났다. 구 예산 장복초등학교, 예산 대술중학교, 대전 대성고등학교, 충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충남대 재학 중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종교는 개신교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발탁되어 대통령 비서실에서 인사행정관과 사회행정관으로 2년여 동안 근무했다. 이어 오명 과학기술부 장관의 정책보좌관으로 일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유성구청장 선거에 출마해 현직 구청장이던 한나라당 진동규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유성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했다. 2018년 2월 12일, 대전시장 출마 이유로 유성구청장직을 사퇴했다.

# 복사 수준의 석사 ‘논문 표절’, 석사 학위 반납했나 철회했나?

허태정 후보는 2014년 석사학위 논문을 표절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유성구청장 재직 시절 2012년 제출한 석사 논문이 질과 양에서 역대 최고인 80% 표절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를 검증한 연구진실성검증센터는 “여러 논문을 짜깁기하는 수고조차 없는, 그냥 다른 논문 하나를 통으로 다 베껴버린 진짜 ‘복사 표절 논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센터는 또 “센터의 논문 표절 검증 역사상 표절 분량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한 엽기적 사건” 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문창기 처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차적으로 주민의 대표기관이 되겠다고 나온 후보가 표절을 한다? 특히 그 당시에 공직에 있었거나, 선출직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논문을 작성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없었을 텐데도 논문을 썼다는 것은 표절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밝혔다. 허 청장은 논문 표절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사과문을 통해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계기로 삼겠다. 유성구민들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공식 사과했다.

 

 

 

 

 

 

 

# 문용욱 사망 전 마지막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나?

지난 1월 14일, 문용욱 세종시 교육감 비서실장이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시중에서는 사인은 물론 전날 누구와 술자리를 함께 했는가 적지 않은 의문이 제기됐다. 이날 유성구 노은동의 한 음식점에서 가진 술자리에는 허태정 유성구청장, 최교진 세종시 교육감을 비롯해 윤원철 충청남도 정무부지사, 허승욱 충청남도 전정무부지사 등 4명과 문용욱 실장이 함께 한 것으로 밝혀졌다.

문 실장은 13일(토) 밤 10시 40분께 대전 월드컵 경기장 CCTV에 모습을 드러낸 뒤 마지막으로 쓰러졌다. 유성경찰서 등에 따르면 문용욱 실장은 13일 집에 들어오지 않아 가족들이 14일 오전 경찰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이어 이날 오후 1시 30분께 한 주민에 의해 월드컵 경기장에서 변사 상태로 발견돼 경찰에 신고됐다. 문 실장은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세종시교육감 비서실장을 사직하면서, 민주당 대전시장 출마를 준비 중인 허태정 후보의 선거캠프를 이끌 결심을 굳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 고 문용욱 실장 대타가 최종길 보좌관?

문용욱 세종시교육감 비서실장은 친 안희정 그룹의 충청권 ‘브레인’ 역할을 해왔다. 문 실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故구논회 의원 보좌관과 노무현재단 지역위원회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며 안 지사와 의기투합했다. 2010년 안희정의 충남지사 첫 도전과 2014년 재선에 일조하기도 했다.

문 실장은 ‘충남대 386그룹’ 일원으로, 지역 정치권의 판을 짜는 전략가 역할을 도맡아 왔다. 지난 2012년 총선에는 문 실장 자신이 민주통합당 유성 예비후보로 나섰으나, 중앙당 전략공천에 밀려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충남대 사학과 85학번인 문 실장은 충남대 철학과 85학번인 허태정 유성구청장과 대학시절부터 뜻을 함께해 온 친구이자 동지로 허 청장 당선의 산파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지역에서는 허태정 청장이 대전시장에 출마하면, 문 실장이 전략기획 부분을 총괄할 것으로 보았다. 문 실장이 심근경색으로 급사한 때문일까. 허태정 후보 캠프에서는 조승래 국회의원(유성갑)의 최종길 보좌관이 사실상 기획 파트를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조승래 의원은 대전지역 지방선거를 총괄하는 지방선거기획단장을 맡고 있다. 그런 조의원의 현역 보좌관이 허태정 후보 캠프 초창기부터 사실상 선거 기획 업무를 도맡은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다. 조승래의원이 지선기획단장을 고사했던지, 아니면 최종길 보좌관을 허태정 캠프에서 배제하는게 온당한 처신이다. 최종길 보좌관은 2016년 조승래 의원실로 옮기기 전까지 박병석 국회의원을 보좌했다.

한편 지난 3월 초 유성구청장 예비후보로 등록한 정용래 후보는 선거캠프로 조승래 국회의원 사무실을 그대로 쓰고 있다. 허태정 후보의 유성구청장 시절 비서실장과 조승래 의원 보좌관을 거친 정용래 후보에 대해 대전시 시의원 출신 김동섭, 조원휘, 송재윤 유성구청장 예비후보들은 한결같이 의구심을 보내고 있다. 행여 ‘보이지 않는 손’에 따른 불공정 경선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 허태정, 안희정의 그림자를 지워야 산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비서실장을 지낸 조승래 국회의원은 안지사의 좌청룡 우백호에 해당하는 측근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비서실장 출신인 조승래 의원은 안 전지사의 성폭행 의혹에 대해 “부끄럽고 참담하다”고 말한 바 있다. 조 의원은 안 전 지사 초대 비서실장과 안 전 지사 싱크탱크로 알려진 ‘더 좋은 민주주의 연구소’ 사무국장을 지내는 등 안 전 지사 최측근으로 꼽힌다.

지난해 장미 대선 당시 대전지역 대부분 정치인들은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허태정 유성구청장을 비롯한 유성의 시·구의원 들은 안희정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른바 안희정의 ‘충청 대망론’에는 대전‧충남지역 조승래, 김종민, 박수현 등 ‘친안’ 정치인들의 보이지 않은 힘도 상당한 영향을 줬다.

안희정계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2018년 재보궐선거로 약진을 시도했다. 박수현이 충남지사, 허태정이 대전시장에 각각 도전했고 허승욱 충남 정무부지사는 퇴임 후 천안갑 재보궐 선거에 도전한 상황이었다.

 

 

 

 

 

 

 

# “저는 안희정의 꼬붕이 아닙니다”

2018년 3월 5일 저녁을 기해 안희정계는 안지사의 성폭행 의혹으로 사실상 공중분해됐다. 안희정 사건 이튿날 3월 6일, 정국교 전 국회의원은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경악과 분노로 밤을 꼬박 새운다. (중략) 후배이자 경쟁자인 허태정은 친구 한 놈 잘못 둔 죄로 나보다 더 허탈한 심정으로 이 밤을 하얗게 세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지난해 12월, 허 청장이 김부겸 장관과 대전 몇 분이 저녁을 하는 자리에 참석하겠다고 해서 “김 장관은 안지사의 경쟁상대인데, 안지사 쪽에서 불편해하지 않겠는가?” 라고 만류했으나 허 청장이 “저는 안희정의 꼬붕이 아닙니다”라고 해서 일순 당황했었다는 것이다.

안희정계에 속한 정치인들은 이제 안희정과 결별해 스스로의 역량으로 살아남아야 할 운명에 처했다. ‘친안’이었던 시절을 커밍아웃하고, 오직 민심의 눈높이에 맞춰야 진정한 정치인으로 거듭날 것이다. 과연 이번 선거에서 ‘문재인 팬’과 대전 민심은 누구 손을 들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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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절불굴의 아이콘 박영순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에 새싹들처럼” 박영순 후보는 굴곡의 정치 역정 속에서 지치고 힘들어도 넘어질 줄 모르는 ‘오뚝이 인생’을 살고 있다. 마치 동갑내기였던 가객 김광석의 노래 ‘일어나’처럼.

박영순 후보는 1964년 충남도 부여군에서 태어났다. 대전 문화초등학교, 대전 제일중학교(북 중학교), 대전대신고등학교, 충남대학교 영문학과(83학번)를 졸업했다. 군 복무는 육군 하사로 강원도 철원 6사단 GOP 철책에서 복무했다. 결혼은 전통혼례 방식으로 올렸다. 충남대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1989년 11월 전대협 부의장으로 자유한국당 전신인 민정당 가락동 연수원 점거농성을 주도하다 구속돼 2년여간의 옥고를 치렀다.

전대협 동지들과 함께 5공 청산과 공안통치 분쇄를 주장하며 민정당 연수원을 점거 농성했지만 20여 분 만에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 시국 관련 재소자들은 접견을 유독 제한받았다. 심지어 가족들의 면회까지 금지 당했다. 그러자 박영순은 이에 반발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가혹행위를 당하며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기까지 했다.

1989년 한남대 4학년 총학생회장이었던 임봉철은 박영순과 함께 민정당 연수원 점거 농성에 한몫했다. 그러다 같이 구속 수감되는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 이후 시민운동 활동을 이어오면서 민주당 대전시당 정책실장을 맡으며 정치에 입문했다. 지금도 변함없이 박영순 후보의 곁을 지키고 있다. 한편 전대협 3기 회장은 당시 한양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임종석 현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1989년 당시 전대협 명지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복기왕 전 아산시장은 지금 충남지사로 후보로 나섰다.

# 민정당(현 자유한국당의 전신) 연수원 점거 농성

1985년은 여러모로 뜨거운 해였다. 2월 8일 김대중이 귀국했고, 나흘 후 치러진 2.12 총선에서 신민당이 등장해 돌풍을 일으켰다. 김민우 총재가 ‘선명야당’을 외최며 이끈게 주효했다. 5월에는 ‘반미운동의 대중화’가 시작된 미 문화원 점거 사건이 일어났다. 이렇게 2년 후 일어날 6월 항쟁의 전조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건은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는 변방 중의 변방인 서울 송파구(당시는 강동구) 가락동에서 일어났다.

1985년 전두환의 폭압 통치가 여전하던 시절이었다. 점점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한 11월 18일, 서울 시내 14개 대학에서 나온 전학련 소속의 학생들 191명이 문을 연지 반 년 밖에 되지 않은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84년 11월의 민정당사, 85년 5월의 미 문화원 이후 점거농성단 규모로는 최대 ‘병력’이 민정당 중앙정치 연수원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민정당 중앙정치 연수원 점거 농성 학우들의 20개 요구 사항’을 뿌렸다.

내용은 광주 원흉 5적(전두환, 노태우, 박준병, 권정달, 위컴)의 처단, 매판 독점 자본 해체, 새마을 운동본부 등 전두환 정권 친위세력의 권력형 부조리 공개 및 책임자 처단, 언론기본법과 보도지침 등 언론에 대한 통제 철폐와 정권의 나팔수인 KBS 해체 등 정치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있었다.

이 연수원을 둘러싼 소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만 4년 후인 1989년 11월 8일, 충남대 학생회장 박영순을 위시한 46명의 학생들이 다시 점거 농성을 벌였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어 1992년 3당 합당 끝에 탄생한 민자당이 이제는 송파구가 된 가락동 정치교육원 부지를 부실기업인 ㈜한양에 매각한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민자당의 대권후보 경쟁이 과열되던 시점에서 나온 이 보도는 특혜대출 시비와 정치자금 수수설 등 지저분한 추문으로 이어졌다. (일부 내용과 사진은 ‘민주화 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발췌 인용)

 

 

 

 

 

 

 

 

 

 

 

# 박영순은 대전 시의원 선거도 낙선했던 흑역사를 극복할까?

박영순은 출소 후 서대전 일사랑 청년회장, 전국 택시노조 대전시지부 사무국장 등 시민운동을 이어오면서 노무현 사단의 지방자치 실무연구소 멤버로도 활동했다. 1993년 특별 사면된 후,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전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정책보좌역을 맡으며 현실정치 안으로 들어왔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으로 임명됐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대덕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2위로 낙선한다. 같은 해 2006년 충남대학교병원 상임감사에 임명되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다시 대덕구청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정용기 대덕구청장에게 밀려 3위로 낙선한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대덕구청장 선거에 세 번째 출마했다. 이번에는 새누리당 박수범 후보에 밀려 낙선하며 대덕구청장 선거에서 3전 전패를 당한다. 약 한 달 뒤 치러진 대덕구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다시 출마했으나 새누리당 정용기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또다시 새누리당 정용기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로써 정용기에게 4번, 박수범에게 1번으로 무려 12년 동안, 5번이나 대덕구민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낙선했다.

그런데 사실 박영순 후보에게 구청장, 국회의원 선거 낙선 이전에 흑역사가 하나 더 있다. 1995년 제1회 지방동시선거 대전 중구 4선거구에서 민주당 시의원 후보(시장 후보 변평섭)로 입후보한 사실이 있다. 그때도 자민련 리기웅 후보에 밀려 2위로 낙선했다. 당시 자민련 바람이 대전과 충남북을 휩쓸 때였다.

# 박영순의 ‘굽이 돌아가는 길’은 종착역에 도달할까?

연거푸 낙선에 따라 절치부심하던 박영순을 권선택 전 대전시장이 2016년 대전시 정무특보에 임명했다. 그러던 중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사회혁신수석실 제도개선비서관실 선임행정관에 임명되었다. 박영순은 2018년 3월 초 청와대에 사표를 제출하고 대전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출마의 변은 “강한 대전을 만들고 시민중심의 소통과 흙수저, 즉 서민과 ‘을’을 위한 시장이 되겠다”라는 것. 그는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학생운동, 노동운동, 시민사회운동 등 힘없는 사람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했고, 그 속에서 보람을 찾아왔다. 애송시 중 하나가 박노해 옥중 에세이 시집 <사람만이 희망이다> 중에 실린 ‘굽이 돌아가는 길’이다. 박영순 후보는 과연 4전 5기가 아니라, 7전 8기의 신화를 쓸 수 있을 것인가?

조영민 기자 dt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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