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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길 X-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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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길 X-Mas
  • 윤석구 칼럼니스트
  • 승인 2011.12.05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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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중위로 진급하여 공군기술고등학교에서 영어교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이 학교는 공군의 장기하사관을 국비로 양성시키는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전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지원하여 경쟁률이 꽤 높은 학교였다. 교관들 역시 훈련과 교육을 동시에 감당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참으로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며 키워 냈다.

모처럼 X-MAS 휴가를 얻어 고향을 찾아 가는 길이었다. 남색 약복을 잘 차려입고 점퍼차림으로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 하나님이 정해준 장소에서 우연히 한 귀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자태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었다. 나는 순간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짝을 찾아 나섰을 때 샘에서 물을 긷고 있는 리브기를 만났던 장면을 연상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 처자가 무릎위에 얹어놓고 있는 책자에 내 시선이 쏠렸다. 그 책자에 쓰여 있는 이름을 수십 번 뇌까리며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머릿속에 되뇌어 암기했다. 그리고 헤어지기 직전에 어디에 사는지를 혹시나 하면서 물어보고 이것도 역시 기억 속에 담아두었다.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고향 마을을 걸으며 조금 전의 일을 귓전에 떠올리면서 상념에 잠겨 보았다. 그리고 알려준 주소로 용기를 내어 편지를 써서 보냈다. 내용은 데이트 신청이었으며 일시와 장소를 묻는 편지였다. 어지간해서는 편지를 좀처럼 쓰지 않았던 사람이 일단 마음을 먹으니까 어쩌면 그렇게도 펜이 잘 굴러가는지......,

일단 만나고 나서 보니 웃지도 못할 해프닝이 터지고 말았다. 그 책자의 이름이 자기 이름이 아니라 집에 가는 길에 갖다 주려고 했던 전기과에 재학 중인 동생의 전공서적이었다고 실토하는 일이 벌어졌다. 둘은 배꼽을 쥐고 웃었다. 여하튼 우리는 이 일로 더욱 친근감을 갖게 되었으며 서로 간에 왕래하는 테이트 길을 터놓게 되었다.

나는 토요일만 되면 장거리 전화를 걸어 약속을 한 다음에 통일호를 이용하여 기차역에 도착하면 자그마한 역사에서 큰 키에도 발돋움을 하여 유리창을 넘어 승객들 중에서 내 모습을 찾느라고 그녀의 눈은 엄청 바쁘게 움직였다. 만난 후에 근방에 있는 명소들을 찾았고 근교에 있는 산과 사찰을 중심으로 다니면서 둘만의 사랑을 키웠다.

이제 결혼을 결심하고 어려운 형편을 보여줘야겠다는 심술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빈지문 가게에서 두 동생과 함께 장사하시며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무작정 대전으로 모시고 단칸방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과연 이러한 환경을 보고도 결혼할 의사가 있는지의 여부를 감별하는 테스트였다.

만약 ‘OK'하고 허락하면 내 평생 모든 힘을 다하여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하고 아껴 주리라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것처럼……. 당시 내 마음 속에는 현재의 어려운 환경을 반드시 딛고 일어서서 언젠가는 성공하리라는 꿈과 환상을 갖고 있었으며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했었다. 게다가 어려운 영어를 전공하였기 때문에 매사에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그 이후 한 달 여 만에 답신이 도착했는데 그 때의 기쁨은 온 천하를 다 얻은 듯 한 즐거움이었다. 왜냐면 한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성취감도 있지마는 이 여인은 현재의 환경보다 다가올 하나님의 축복을 예견하는 두뇌가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후 2년여 뒤에 장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교사가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으며 결혼날 전후로 폭설이 내렸다. 축복의 서설이라고 여기고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하나님의 축복을 기리며 교회를 예식장으로 삼아 수요일 오후 3:00에 예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난데없이 학교 학생들이 학급에 붙여져 있는 액자와 거울 등을 전부 떼어 와서 선물하는 바람에 큰 소동이 벌어졌다.

나중에 학교에 출근하여 알아보니 호주머니에 돈은 없고 선생님 결혼식에 참석하여 선물은 해야겠지 하는 다급한 마음에 역발상을 하게 되었다고 자백하는 제자들을 보고 얼마나 고마운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이 제자들과 나는 존경과 사랑 속에서 끈끈한 정을 이어가고 있다.

내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 이유는 대학교 재학시절에 아르바이트를 할 때 외국인 예배 시에 배웠던 값진 교훈 때문이었다. 외국인들은 주일 오후 4:00에 예배를 드리는데 나는 그들의 예배처소를 마련해주고 성경책과 찬송가를 의자에 가지런히 놓아드리며 강당 청소를 말끔히 해드렸다. 예배에 참석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온 가족이 함께 했으며 특히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손자와 손녀를 보석처럼 품에 안고 착석하여 예배드리는 모습이었다.

‘아…….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예배의 모습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미래의 나의 가정의 모델로 삼기로 했다.

나는 이제 교사로서 부친의 소원을 잘 이루어 드리고 정년은퇴를 하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4남매를 두고 임마누엘교회의 장로로 교회의 사역을 돕는 일에 열심을 다하며 나라와 교회, 가정과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또 영어친구마을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며 배우고 경험한 것을 사회에 나누어 주려고 온갖 정성을 기울여 일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섬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ysk0848@hnamil.net

윤석구 칼럼니스트 ysk08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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