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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리 징검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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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리 징검다리
  • 윤석구 칼럼니스트
  • 승인 2011.12.0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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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전역을 앞두고 동기생들은 사화에 첫 발을 내디디려고 서로 간에 정보를 공유하며 여러 가지 인생계획을 세우고 분주히 움직였다. 영문과를 전공했으니 외교무대로 진출하느냐 아니면 정계 혹은 사업이나 취업 등 여러 모양의 진로를 다방면으로 모색하고 연구하는 때였다. 나 역시도 그들과 한 마음이 되어 제대 말년에 일손이 잡히지 않은 채로 마음속에 구상만 하고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 처지였다.

그러다가 당시 내가 살고 있는 대동 옆 자양동에 위치한 학교에 우연히 들려서 바람을 쏘이며 그 학교 운동장 주변을 서성였다. 그런데 군복차림의 군인 두 ․ 세 명이 운동장에서 학생들에게 총검술을 가르치는 현상을 목격하고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웬 학교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그들이 수업을 끝나기를 기다려 교무실에 들려 간단히 통성명을 하고 나도 현역임을 소개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잠시 후에 한 교관이 그 학교 교감선생님에게 다짜고짜 나를 소개해서 면담을 했는데 전역이 한 달 밖에 안 남았고 영문과 전공자임을 알고 나시더니 초면에 간곡한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내용인즉 1학년을 담당하는 영어선생 한 분이 여름방학 중에 이민을 가야 하기 때문에 학기 도중에 영어선생님 한 분을 급히 초빙해야 할 입장이라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 청탁을 받고 반심반의의 대답을 하고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우선 부대로부터 잠정적으로 전역준비 휴가를 인정받아 한 달 동안 학교에 시험출근을 하고난 뒤에 결심을 해 드리겠다고 약정을 하고 학교에 첫 출근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내 교사 인생이 시작되게 되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아주 수월하게……. 또 군대처럼 이⁃취임식도 없이 아주 조용하게…….

여름방학이 되어서 전 교사가 근교에 있는 흑석리로 야유회를 위하여 출발했다. 전 교직원이 거의 80여명에 이르렀으며 버스 2대를 나눠 타고 출발하여 한 학기의 회포를 풀며 상호간에 우의를 돈독히 하는 자리였다. 마침 나는 동생들의 담임교사와 안면이 있었고 운동장에서 만났던 교련선생들과 만남이 있었던 것을 교제삼아 초년병 교사로 예의를 갖추며 많은 교사들과 술잔을 같이 했다.

그러나 80여명의 선생님들에게 한 잔씩 대접해 드리면 되겠다고 나를 과신했던 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사실 나는 주량이 대단한 것으로 자신을 착각했던 것이다. 선의로 신고식 겸 인사차 대접해 드리겠다고 시작하여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술이 깨고 나서 알게 된 이야기이지만 교련선생 둘이 한 분은 내 코를 잡고 다른 한 분은 입을 벌려 병 채로 마시게 해서 내가 인사불성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고들 했다. 모든 선생들이 나를 추스르느라고 야단들이었고 버스좌석도 교장선생님이 앉아야 할 제일 상석에 앉게 되었다고 하면서 행사 이후 나에 대한 주사가 술자리마다 화젯거리였다고 많은 귀띔을 해주기도 했다.

흑석리는 기차역에서 마을을 가기 위해 나무기둥 위에 송판을 깔고 간신히 한 명이 지나갈 정도의 징검다리가 놓여있었으며 그 밑을 흐르는 시냇물은 그야말로 명경지수였고 1급수에서나 살 수 있는 물고기들이 쉴 사이 없이 바삐 움직여 대고 있었다. 아마 무릉도원과도 흡사한 청정지역이었다.

이 학교는 주야간이 있었으며 상업고교로 당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명문사립고였다. 은행을 비롯한 취업 그리고 진학 반을 통한 대입시도 성공을 거두는 교육기관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교육력을 갖고 있었다. 졸업한 후 20주년과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고3담임선생님들을 모시는 아름다운 전통도 가지고 있는 학교이다.

그런데 하루는 직원회의 석상에서 학교장이 직접 납부금을 독려하며 말씀하기를 아이들로부터 납부금을 받아야 선생님들 봉급을 지급할 수 있다고 천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 앞으로의 계획에 온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부대에서는 관리처에서 행정실 근무자가 봉급을 타서 서랍 속에 넣어두고 봉급을 수령해 놓았다고 보고하면 봉급날인 것을 알았던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빨리 이곳에서 탈피하여 본래의 염원인 유학 쪽으로 신경을 쓰던 차에 대기업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하여 6년 만에 이 학교를 등지게 되었다. 입사하고 나서는 기존의 학교영어를 무역영어로 바꿔야만 했다. 결국 유학의 길이 어긋나 엉뚱한 곳에서 둥지를 틀게 되고 말았다. 사실 당시에 유학을 간다는 것은 정보가 너무 어두웠고 가능성마저 극히 미미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ysk0848@hanmail.net

 

 

윤석구 칼럼니스트 ysk08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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