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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석구 칼럼니스트
  • 승인 2011.10.3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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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층 한옥으로 마치 롱 하우스 저럼 ㄱ자로 지어진 아담한 생활공간이었다. 2인 1조의 방으로 책상과 의자 그리고 매트리스와 담요 및 이불이 준비되어 있고 연탄용 보일러가 설치되어 있었다. 창호지문을 열면 마루가 길게 깔려 있어서 맨발로 이 방과 저 방을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 편리함이 있었다.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단체 식당이 마련되어 있었고 한 끼 당 식사대는 20원이었다. 당시 버스요금이 5원이었으니까 지금의 시세로 환산한다면 거의 4000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목요일 저녁에는 고깃국이 나오는 날이라 대개 아침을 거르거나 아니면 점심을 거르고 맛있는 저녁식사를 기대하는데 어떤 때는 살코기는 다 사라지고 기름만 둥둥 떠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도 맛있다고 곱빼기로 먹는 친구도 종종 눈에 띄었다. 하지만 호주머니 사정으로 식권이 모자라 끼니를 때우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는 날들도 있었으니…….참 배고픈 시절이었다. 

막걸리 한 잔도 못 마시던 사람이 여러 친구들을 사귀는 사이에 주량이 점점 늘어가고 그렇게 책과 씨름하던 사람이 정반대인 사회성 쪽으로 발달되어 갔다. 당시 학장님은 Dr. John, 요한 목사님으로 미국인 선교사이셨는데 우리말 뿐 아니라 중국 고전도 스스럼없이 자유자재로 표현하시는 언어구사의 귀재이셨다. 영문과 정원이 10명이었고 전교생의 숫자가 200명 안팎이라 교수와 학생 또 선후배 사이에 모르는 얼굴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미숀 스쿨이기 때문에 학점이 다소 떨어져도 근로 장학생 제도를 만들어 학교 당직이나 전화교환원 등의 이름으로 장학 혜택을 주었으므로 전교생이 모두 장학생이라고 보아야 했다.

하지만 미국인 교수들의 학점은 마치 소금장수처럼 지나칠 정도로 짜고 짰다. 이 교수들에 의해서 A학점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도전한다는 각오가 있어야 했다. 토론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들에게 매 수업 시간마다 과제물 점검을 하고 발표시간을 주어 상호토론하게 하고 교수는 호랑이 수첩에다 일일이 소수점 이하까지 기록하고 정규고사와 함께 성적을 매겨줌으로 우리는 매 시간마다 극도의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토론이 영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어구사력 증진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왜냐면 대부분의 교수들이 우리말을 거의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1년 정도 지나서 전교생이 야외로 필드 트랩을 갔을 때 몇 명이 방안에 모여 녹음기를 틀어놓고 음악에 맞춰 담배도 피우고 술잔도 들어 올리면서 당시에 유행했던 몽키춤(monkey dance) 파티를 즐겼는데 교목 목사님이 문구멍으로 들여다보시고 일일이 수첩에 적어 개인면담을 통해 벌을 내린 적도 있었다. 나는 모범생으로 인정받고 있는 터라 더 많은 꾸지람을 듣고 그 다음에 부임하신 Dr. Talmage 학장님께 불려갔다. “너...도 담...배...피우...나?”라고 어설픈 우리말과 안경 너머로 쏘아보듯 하시면서 책망하셨다. 난 그 때 하도 웃음이 나와 억지로 참느라고 꽤 곤욕을 치렀고 모든 영어실력을 총동원하여 다시는 신앙윤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용서를 빌었던 일이 기억난다.

본래 놀기를 좋아하여 친구 사귀는 일에 열중하며 세상을 즐기다 보니 학교성적이 장학생 기준에 미달되어 본의 아닌 등록금 걱정을 해야 했다. 때는 한가위 추석이라서 아무 힘도 되어주지 못할 시골이지만 찾아갔다. 왜 보름달은 그토록 휘영청 밝았는지!…….간신히 하룻밤을 지내고 학교로 돌아와 무작정 기숙사 동산으로 올라가 캄캄한 중에 소나무 한 그루를 붙들고 처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를 드렸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는데 공처럼 환한 불덩어리가 내 몸을 온전히 감싸는 꿈을 꾸었다. 참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몸에 내린 이슬을 닦고 명절이라 아무도 없는 기숙사 방으로 터덜터덜 거리며 들어갔다.

당시 나는 대학교 장학생입학을 위하여 교회를 이용했을 뿐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믿음생활을 하는 때라 전도하려는 친구들에게 물이 가열되면 2개의 수소와 1개의 산소로 나누어지듯이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내 손바닥에 증명해보이라고 되레 야단을 치기도 했다. 그리고 체면상 참석하는 채플 시간에 들려지는 말씀들이 왜 그렇게 의심이 가는지…….하나도 믿기지 않은 허무맹랑한 소리로 귓전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현실과 신앙 사이에 갈 바를 몰라 방황하는 바로 그 때에 학장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내 기도 속에서 네가 무언가 염려하는 모습이 보이더라. 라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건가?…….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내 문제를 상세히 말씀을 드렸다. 실은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돈이 모자라 전당포에 시계를 맡겨 쩔쩔매고 있던 처지였다. 대학 입학 선물이라고 누님이 사준 시계였다. 학장님의 매서운 눈초리에 꼼짝없이 이실직고하고 시계를 ‘저당'(mortgage)잡혔다고 말씀드렸더니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무라시듯 역정을 내시면서 다정하게 타일러 주셨다.

그리고 K. C. A 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는 침례교회 목사님이신 Frank A. Baker 선교사님을 소개시켜 주셨다. 미국 플로리다 주립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이기도 한 목사님은 두 딸과 함께 오붓한 한국생활을 하고 계셨다. 나를 보자마자 반색을 하시고 나의 학교생활을 도울 수 있는 대로 도와주겠노라고 말씀하시면서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으시고 어깨를 토닥거려 주셨다. 이후에 계속하여 나의 학교생활에 후견인이 되셔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셨고 다급한 등록금 문제도 말끔히 처리해 주셨다.

이 이야기를 들으신 어머니가 참 좋으신 분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조그만 선물을 준비하셨다. 대나무로 만든 둥근바구니 제일 밑에 밤을 깔고 그 위에 절반은 대추 또 절반은 홍시 감 그리고 제일 위에는 송편을 올려놓으시고 보자기로 싸서 주시면서 작지만 어미 맘이니 가져다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보자기를 풀고 선물을 보시더니 선교사님 온 식구가 손뼉을 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환호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너무 즐거워하시는 모습에 나도 엉겁결에 동화되고 말았다.

아 아 이것이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기도의 응답이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뒤늦게 깨닫고 큰 감사를 드린다.

ysk0848@hanmail.net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윤석구 칼럼니스트 ysk08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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