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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진성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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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진성의 봄
  • 윤석구칼럼 기자
  • 승인 2011.10.19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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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한학을 토대로 일제 강점기를 통하여 많은 문물을 접하는 가운데 초등학교 교사의 위엄에 크게 감동을 받아 자식중 하나를 교단에 서게 할 목표를 갖게 되었다. 당시 사진으로 보면 교사는 허리에 총과 니뽄도를 차고 교실에서 수업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심지어 학교교사가 사법권까지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음을 경험한 선친이 자식에 대한 그런 욕심을 갖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중3이 된 나를 그 대상으로 삼아 사범고등학교에 진학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지만 절친하신 선생님이 사범고를 고집하기 보다는 사대를 목표삼아 사대 부고를 지원케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를 하셨고 부친의 생각에도 중고등학교 교사가 더 낫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 고집을 꺾으시고 차선책에 지원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하셔서 사대 부고에 입학하여 옹진성에서 새봄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 학년이 한 반에 60명 정원으로 3개 학급이었으며 인문계 국립고로 학생들의 향학열이 대단한 학교였다. 매달 월례고사를 실시하여 1등부터 꼴찌 까지 성적순위로 방을 만들어 운동장 옆 건물 벽에 붙였었다. 당시 우리 집 온 식구가 한 달간 먹고 살 수 있는 양인 쌀 다섯 말 정도를 주고 하숙을 하고 학교에 다녔는데도 성적은 거의 바닥인 하위권에 이름이 나붙었었다. 이를 직접 보고 온 하숙집 형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야 이 정도밖에 안되니”라고 야단치는 듯 한 눈초리였다.

평소 눈치가 남보다 한 수 더 빠른 나는 속상함을 삭일 길이 없어 저녁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안방에 들리지 않게 엄청 흐느껴 운 적이 있다. 그 다음 달에는 최선을 다하여 공부했더니 중상위권으로 성적이 껑충 뛰어 올랐고 결국에는 상위권에 입성하여 졸업을 하게 되었으며 최고의 명문대에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하면 된다! 는 신념이 생겼으며 울면 된다는 철학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무슨 문제를 만나든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로 매달리고 있다.

당시에는 학원이나 사설학습 기관이 거의 없어서 오로지 학교 수업에 전력투구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노력에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했다. 전기사정도 나빠 밤 11시가 되면 정전이 되고 이후에는 등잔불에 의지하여 절반은 졸면서 책과 씨름해야 했다. 이때부터는 자기 스스로가 멘 토가 되어 공부하는데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으며 깜빡 잠으로 때우기가 일쑤였다.

공부방법이라고 해야 별다른 요령이 없이 주로 암기 위주였으며 반복학습에 매달리는 길밖에 없었다. 영어사전도 외우고 문법책도 외우고 심지어 수학참고서도 외워버린 기억이 난다. 학교 앞에서 방을 얻어 4명이 자취를 했는데 4계절 모두 전적으로 자연에 환경을 내 맡긴 채 더위와 추위도 몸소 몸으로 때우면서 열공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 봐도 참 대견스러운 일이었다고 회상해 본다. 이 모두가 전부 명문대 입시를 위한 투자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ysk0848@hanmail.net

 

윤석구칼럼 기자 ysk08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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