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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후보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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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후보 일대기
  • 박강복 기자
  • 승인 2017.04.04 1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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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의 안철수 후보<안철수 캠프 제공>

[KNS뉴스통신=박강복 기자]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4일 대선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안 후보는 이날 대전시 중구 한밭체육관에서 열린 ‘19대 대선 후보자 선출 완전국민경선 대전ㆍ충청ㆍ세종 권역 순회 경선에서도 압승을 거둬 총 7번의 지역순회경선에서 모두 승리하며, 본선 티켓을 거머쥐었다.

▲국회 등원 당시 안철수 후보<안철수 캠프 제공>

▲안철수 후보 일대기

1. 호기심 많은 소년, 과학자를 꿈꾸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는, 1962년 2월 26일 부산 진구 범천동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생명을 사랑하고 호기심 많은 소년이었다. 시장에서 사온 병아리를 정성껏 돌봐 모두 닭으로 키웠다. 어머니로부터 새들은 알을 품으면 새끼가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메추리알을 품고 잠이 들기도 했다.

좀 더 자라서는 기계에 푹 빠졌다. 기계만 보면 생기가 돌았고, 라디오든 전축이든 시계든 눈에 보이는 대로 분해해버렸다. 보통 남학생들에 비해 섬세해서 조립하는 일에 재주가 뛰어났다. 비행기, 탱크를 만들고 공모전에 응모해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2. 책벌레 학창시절

안철수 후보가 글을 깨친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 이후로는 활자중독 증세까지 보였다.

등하굣길에 걸으면서도 책을 읽었다. 학교 도서관이 작기는 했지만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쯤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게 되었다. 도서관 사서가 장난으로 대출카드에 이름을 적는 걸로 오해할 정도였다.

3. “잘 다녀오세요”라고 배웅해줬던 어머니

안철수 후보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존댓말을 썼다. 아버지는 장남인 철수가 본인의 업을 따라 의사가 되기를 내심 바랐지만 겉으로 드러내 표현하지는 않았다.

4. 의대 진료 봉사활동, 사회적 삶에 대한 고민

안철수 후보는 의대 재학 시절 진료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회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특히 기억에 남는 환자로 초등학생 손녀와 단둘이 살며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던 할머니를 꼽았다. 아들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며느리는 집을 나간 후, 초등학생 손녀가 신문배달을 해 할머니를 부양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된 손녀는 가출을 했고, 할머니는 굶어 돌아가신 채 발견됐다.

안철수 후보는 “소설보다 잔인한 비극을 경험했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각자 해야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들이 깊어졌다”고 말했다.

5. 백신프로그램 개발해 무료 배포, 7년간 새벽잠 설쳐

88년 초 ‘브레인 바이러스’가 한국에 상륙했다. 안철수 후보는 당시 의대 박사과정 중이었다.

마침 컴퓨터를 익히고 있던 안철수 후보는 스스로 바이러스를 분석해서 이를 퇴치할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탄생한 백신은 월간지를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뭔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태반이며, 알더라도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때였다. 잡지사를 통해 수소문 하는 사람, 직접 찾아오는 사람, 새벽에 전화를 걸어 고쳐달라고 하소연 하는 사람 등 의사 안철수가 아닌 컴퓨터 프로그래머 안철수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잠을 줄여 새벽에 일어나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고, 학교에 가서는 실험에 몰두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그토록 고생해 만든 백신 프로그램을 사용자들에게 무료로 보급했다.

의사 겸 백신 프로그래머로서의 생활은 7년간 지속됐다. 안철수 후보는 비록 몸은 고되었으나 사명감과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6. 아내, 나의 ‘소울메이트’

아내 김미경 교수는 안철수 후보의 한 학년 후배였다. 의료봉사를 하며 가까워졌고 주로 도서관에서 데이트를 했다.

김 교수도 안철수 후보와 같이 평범하지 않은 선택을 하며, 도전하며 살아왔다. 17년 전 의약분업 문제로 의사들이 파업했을 때 사회구조와 제도에 관심을 갖고 법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3년을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먼저 공부했고, 스탠포드 법대 연구원으로 일하며 법대와 의대 양쪽에서 모두 논문을 썼다. 캘리포니아와 뉴욕 주 두 군데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다. 서울대 의학 박사이자 미국 워싱턴주립대 법학 박사다.

안철수 후보는 김 교수를 “첫사랑이자 소울메이트”라고 말한다. 신혼 때는 아무 곳에나 양말을 벗어놓아 자주 혼이 났었다고 한다.

7. 의대 교수에서 벤처기업 경영자로

안철수 후보는 군의관 복무를 마친 다음, 의사로서의 삶보다 더 큰 자부심과 보람, 사명감을 느낄 수 있었던 컴퓨터를 택했다.

95년 벤처기업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해 경영하는 동안 어려운 결단을 해야 하는 순간은 끊임없이 찾아왔다. 그러나 늘 원칙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했다.

외국 유력 보안회사로부터의 천만 달러 인수 제의를 거절한 일, 닷컴 기업에 투자하면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핵심역량과 관계되는 분야가 아니면 투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던 일, 벤처 열풍이 광풍처럼 불었을 때에도 코스닥에 등록하지 않고 기다렸던 일 등이 그러했다.

선택의 기로에서 최종판단의 근거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옳은 결정인가’, ‘누구에게 이익인가’ 하는 문제였다. 안철수 연구소에서 만든 백신 프로그램은 일반 사용자들에게는 무료로 보급되었고 기업체와 관공서에는 유료로 판매되었다.

8. 승승장구 한 것이 아니다. 직원들 월급 줄 돈이 없었던 시절

회사 창립 2년째, 직원들 월급 줄 돈이 부족했다. 월급을 주기 위해 빚을 냈다. 그 당시 안철수 후보의 소원이 ‘석달치 월급 줄 돈이 있어서 단 한 달만이라도 월초에 월급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면’ 이었다고 한다.

1999년 12월. 안철수연구소가 제공한 백신에 악성코드가 심어져 잘못 전달된 일이 있었다. 정부 부처가 보낸 훈련용 파일에 실제 악성코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부 V3 엔진파일에 감염된 채로 고객에게 제공되었다. 병원 진단 시스템이 마비되면서 수많은 환자가 제때 치료받지 못해 고통을 겪게 됐다.

상황을 보고받은 안철수 후보는 즉시 사건을 솔직하게 알리고 사과하는 동시에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웠다. 고객에게 두 번 용서를 빌 수 없다는 각오로 시스템과 구조 개선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좌절하기보다는 모든 역량을 집중해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것이 안철수의 방식이었다.

9. 경영자에서 다시 학생으로

안철수 후보는 2005년 3월 창립 10주년 기념일을 기해 회사 최고경영자에서 물러났다. CEO 한 사람의 영향력이 너무 크면 회사가 더 크게 성장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임 후 안철수 후보는 다시 새로운 도전의 길에 올랐다. 경영학을 배우는 것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 스쿨 석사과정에 지원해 약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이미 마흔이 넘은 나이, 방문연구원이나 교환교수가 아닌 시험을 쳐서 학위과정의 학생이 됐다.

경영학을 배우기로 한 이유는 “배워서 남 주기 위해서”였다. 2012년 본인이 보유한 안랩 주식의 절반을 동그라미 재단 창립을 위해 내놓았다.

10. 청춘콘서트와 ‘안철수 현상’

대학 교수로 재직 시절, 안철수 후보는 학생들에게 ‘지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는 했다. 돌아오는 답변은 언제나 취업, 성적, 스펙이었다. 청년들의 좌절과 방황이 심해지는 모습에 고민이 깊어졌다.

청춘콘서트를 열기 시작했다. 청년들을 직접 만나고, 자신의 경험과 배움을 나누며 그들의 멘토로 활약했다.

‘안철수 신드롬’이 생겼다. 2011년 안철수 후보는 서울 시장 선거에서 유력 후보로 거론되며 국민들로부터 50%를 넘는 지지율을 확보했다. 그러나 안철수 후보는 과감히 당시 지지율 5%대에 머물던 박원순 후보에게 양보했다. 어떤 정치적 거래도, 아무 조건도 없는 양보였다.

지금까지의 정치 통념상으로는 비상식으로 여겨지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그는 오히려, "상식이 비상식을 이긴다(박 시장에게 건넨 편지에서)"라고 하면서 새로운 정치에서의 상식의 기준을 제시했다. 언론에서는 이를 ‘아름다운 양보’라고 표현했고, 국민들이 대통령 후보로서 안철수 후보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11. 국회 입성, 새정치연합 탄생

안철수 후보는 ‘새로운 정치’를 꿈꿨다. 2013년 4월 실시된 노원 병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나섰다. 어느 정당도 선택하지 않은 무소속 출마였다. 60.5%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됐다.

안철수 후보는 2013년 11월 ‘국민과 함께하는 새정치 추진위원회’의 출범을 알렸다. “국민의 절실한 요구에 가치 있는 삶의 정치로 보답하고자 한다”고 목표를 밝혔다. 이듬해 2월 새정치연합 창당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12. 민주당과의 통합과 당대표사퇴

안철수 후보는 김한길 전 의원의 손을 잡고 ‘제3지대 창당’을 선언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탄생했다. 안철수 후보와 김한길 전 의원은 1기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은 2014년 7월 재보선에서 1석을 잃었다. 안철수 후보는 패배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당대표직을 물러났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비대위 체제를 거쳐 문재인 대표 체제가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지도부는 재보선에서 참패했다.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과 당 혁신을 둘러싸고 마찰이 빚어졌다.

안철수 후보는 자신이 꿈꾸어 온 정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했다.

13. 국민의당 창당, 4.13 총선 승리

안철수 후보가 탈당한 이후 연이은 탈당이 이뤄졌다. 같은 뜻을 품은 사람들이 힘을 모았다. 2016년 2월 2일 ‘미래를 향한 담대한 변화’를 선언하며 국민의당이 창당되었다. 안철수·천정배 공동대표 체제였다.

그러나 위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두 달 뒤가 총선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이 통합 제안을 하자, 국민의당 내부에서는 통합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의견이 갈라졌다.

안철수 후보는 야권통합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많은 이들이 조롱하고 비판했다. 일부 야권은 ‘새누리당에 180석을 몰아주자는 것이냐’고 몰아붙였다. 하지만 안철수 후보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국민의 염원을 저버리고 양당체제에서 되풀이됐던 무능한 정치를 반복할 수 없었다. 국민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확신이었다.

진심은 전해졌다. 국민의당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큰 성과를 얻었다. 정당명부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하며 전국정당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양당 모두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16년 만에 양당체제가 허물어지고 다당제의 출발점이 마련됐다.

안철수 후보는 “가장 외롭고 힘들었을 때 국민이 손을 잡아주셨다. 가장 따뜻했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박강복 기자 pkb76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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