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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차이잉원의 대만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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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차이잉원의 대만은 어디로?
  • 강병환 박사
  • 승인 2016.01.18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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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환 박사] 예상했던 대로 올 1월 16일 대만에 있었던 제14대 총통, 제9대 입법위원(국회의원) 선거에서 ‘대만독립’을 강령으로 삼고 있는 민주진보당(민진당)이 여당인 중국국민당(국민당)을 제치고 압승했다.

대만의 6개 직할시 모두에서 민진당이 국민당을 이긴것은 1987년 민진당 창당 이래 처음이다. 총통선거에서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59)은 7백만표에 근접하는 56.11%로 국민당의 주리룬(朱立倫,54) 주석이 획득한 31%를 누르고 당선되었고, 입법위원 선거 역시 총 113개의 의석(지역구 73석,원주민 6석,비례 34석)중에서 민진당은 지역구 49석, 원주민1석, 비례대표 18석 총 68석을 획득하여, 총35석(지역구20석, 원주민4석, 비례11석)에 거친 국민당을 누르고 과반이상을 확보하였다.

군소정당 역시 시대역량(时代力量,5석)이 친민당(亲民党,3석)을 누르고 제3당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번 대만선거에서 민진당은 왜 압승을 거두었고, 국민당은 왜 창당이래 최대의 참패를 하였는가. 또한 대만민중은 왜 민진당에게 완전한 집정의 기회를 주었는가.

우선 산을 제대로 보려면 숲도 보고 나무도 보아야 한다. 동아시아 질서라는 구조적인 측면에서 볼 때 대만문제는 중미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온도계다. 미국이 대만의 안전을 보호한다는 ‘대만관계법’과 중국의 ‘반분열국가법’은 대척상태에 있다.

또한 미국과 대만 간에는 ‘연루’와 ‘방기’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중미관계의 협력, 경쟁, 갈등 여부에 따라서 대만의 정치는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특히 미국이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정책을 선언하고 난 후 중미관계는 협력의 요소보다는 갈등 긴장의 요소가 더 많아졌다. '아시아 재균형'(Asia Rebalancing) 정책이라고도 불리는 아시아 회귀 정책은 2011년 가을,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미국외교의 중심축을 이라크, 아프카니스탄에서 벗어나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기 위해 아시아로의 이동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오바마 정부 대외정책의 핵심이 되었다.

미국의 대만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현상유지(status quo)다. 그러나 모든 현상은 변한다. 현상유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미국의 전국방부장 럼즈펠드가 국회청문회에 나와서 명확하게 규정했다. 즉, “대만해협에 대한 현상유지의 정의에 대해서는 미국이 정의하는 현상유지다”고 밝혔다.

미국에 있어서 대만은 아직까지 ‘불침의 항공모함’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만이 독립해 버리거나 통일해 버린다면 중국을 견제할 유효한 카드를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천수이볜 집정기(2000-2008) 미국은 대만의 급격한 독립노선에 ‘연루’되어 원치 않은 전쟁에 개입되지 않을까를 우려하였다. 국민당 마잉주의 삼불정책(불통,불독, 불전- 자신의 임기내에 독립,통일,전쟁에 반대한다) 역시 이러한 미국의 입장, 중국의 입장, 대만의 입장을 혼합한 임시방편적인 성격이 강했다.

민진당의 차잉원 후보는 천수이볜의 급진대만독립노선이 가져온 폐해를 인식하고, 기존 민진당이 가지고 있었던 강경한 대만독립노선을 완화시키고자 하였다. 주미대표를 지낸 미국통인 우자오시에(吴钊燮)를 민진당의 사무총장으로 발탁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미국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려 노력했다. 이러한 결과물로서 양안관계에 있어서 ‘현상유지’를 공약으로 채택했다, 이는 2012년 양안정책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그 결과 지난해 6월 그의 미국방문은 대성공이었다.

둘째로, 2008년 국민당이 집권하자마자, 마잉주(馬英九)는 양안 간에 단절되어 있었던 양회(대만측의 해협양안교류기금회와 중국측의 해협양안관계협회)의 협상을 재개했고, 그의 공약대로 대삼통(통상,통항,통우)을 열었으며, 지금까지 양안 양회는 양안경제기본협정(ECFA)를 비롯한 23개의 협정을 체결했다. 이 23개의 협정의 의제는 모두 경제, 무역, 범죄인도, 원자력안전 등 실제적으로 경제, 사회, 문화에 관계된 것이지, 정치에 관계된 협정은 없다. 특히 23개의 협정의 특징은 중국의 대만에 대한 양보(讓利)다. 이는 경제적 실리를 바라는 국민당의 입장과 경제적인 적자를 정치적인 흑자로 만회할 수 있다는 공산당의 입장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급격한 양안교류가 진행된 결과 양안간의 무역규모는 현재 2000억 달러를 초과하였고, 대만의 중국에 대한 무역의존도는 42%로 치솟았으며, 양안간 항공편만해도 대만의 10개지점과 중국의 54개 지점을 연결하여 매주 700편 이상, 매년 400만 이상의 중국관광객이 대만에 오며, 양안 간에 결혼한 배우자의 공식적 통계도 지금까지 33만쌍을 넘어섰고, 중국에 진출한 타이상(台商)도 150만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대만에 온 중국유학생 숫자도 일로 증가추세에 있다. 중국의 선경촉통(先经促统, 경제로서 통일을 촉진하는 것)과 국민당의 선경후정(先經後政),선이후난(先易後難)이 타협한 결과였다.

이러한 엄청난 교류의 성과에도 불과하고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는 크지 않았다. 이른바 낙수효과는 대기업, 재벌, 고소득층 등 선도부문의 성과가 늘어나면, 연관 산업을 이용해 후발·낙후 부문에 유입되는 효과를 의미한다. 그러나 양안간의 교류로 인해 통계상의 수치는 설령 증가하더라도 실제로는 양안교류로 인해 이익을 보는 사람은 재벌과 일부분의 호텔을 소유한 관광업자에 불과했고, 대만의 민생은 과거와 비해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이는 국민당의 분배보다는 성장을, 형평성보다는 효율성을 우선시한 정책실패를 의미한다. 중국도 이러한 점을 눈치 채고 뒤늦게 대만에 대해서 ‘삼중일청’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즉 기존의 대기업 위주의 교류에서 벗어나 대만의 중소기업, 대만의 중남부, 대만의 중산계층, 청년들에게 더 혜택이 가도록 정책을 조정하였으나 아직까지 그 성과는 미미하다. 이와 더불어 2014년 봄부터 대만학생들의 ‘태양화운동’이 펼쳐졌다. 충분한 소통없이 진행된 양안간의 밀실협정, 역사교과과정 개편 등으로 인해서 학생들은 1990년 이후 가장 큰 데모를 하였으며, 학생운동의 주역세력들은 시대역량(时代力量)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이번 선거에서 5석을 확보했다.

국민당은 양안간의 교류협력에 자신들의 최대강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거에서의 불리한 정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2015년 11월 싱가포르에서 역사적인 양안최고영도자회담 시마회(習馬會-시진핑과 마잉주 회담)를 가졌다. 중국이 국제사회에 두 개의 나라로 보여 질 수 있고, 잘못된 인상을 보낼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국민당의 입장을 받아들여 회담을 개최하였다. 국공양당은 시마회의 회담을 개최한다면 대만의 총통선거에서 국민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급격한 중국경사현상과 급격한 통일에 반대하는 대만민중을 결집하는 반작용을 가져왔다.

대만의 양당위주의 선거는 이념과 지역에 기반에 둔 것으로 양당의 공약에 있어서 중간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양안정책에 있어서만큼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국민당의 주리룬은 92공식(1992 consensus, “양안은 하나의 중국원칙에 대해서 구두방식으로 각자가 표술한다”는 1992년의 양회의 합의)에 기반을 둔 마잉주 노선의 지속추진이었던 반면, 차이잉원은 92공식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만독립을 강령으로 삼고 있는 민진당의 입장으로서 ‘하나의 중국원칙’인 92공식을 인정할 수가 없다. 대신 1992년의 ‘92정신’이라는 말로 피해갔고, 애매모호한 현상유지를 들고 나왔다. 그러므로 대만민중이 차이잉원을 선택한 것은 급격한 통일도 급격한 독립도 피하며, 당분간 현상태로 양안을 유지하자는 민의가 반영된 것이다.

셋째, 국민당 내부의 분열이다. 특히 마잉주와 왕진핑(王金平)간의 마왕지쟁(馬王之爭)이다. 다소 중간지대에 있었던 입법원장 왕진핑의 찍어내기가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 인한 국민당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되었으며 마잉주의 레임덕이 발생했다. 레임덕의 초기 증상은 영(令)이 서지 않는 것이며, 측근들의 부패가 심화되는 것이다. 마잉주 역시 이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이후 그의 지지율은 8%로 떨어졌다. 특히 정상적 절차를 거쳐 뽑힌 홍슈쭈(洪秀柱) 후보를 지지율이 약하다는 이유로 임시전당대회를 개최해 후보자 자격을 박탈했고, 총통선거 불출마를 몇 차례나 공언한 주리룬을 차출해 총통후보로 내세운 것이다. 비록 홍슈쭈는 주지룬의 지지를 선언하였으나 대만의 민의는 이 때 이미 국민당을 떠나고 있었다.

넷째, 후보자들간의 자질 문제다. 2012년 차이잉원은 마잉주와의 선거에 패하고 나서 비로서 준비된 후보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시작했다. ‘속이 들 찬 배추’에서 ‘속이 꽉찬 배추’로 거듭난 것이다. 기존의 온화하고 학자적인 이미지를 많이 버렸고, 정치인으로서의 비핵2025, 원주민에 대한 사과, 국시회의 개최, TPP 가입, 중화민국헌법체제를 명확하게 제시하였고 민진당 내부에서도 확실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에 반해 주리룬은 신베이(新北) 시장직을 버리지 않고 총통선거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급조되고 차줄된 이미지를 보여 양후보자간의 명확한 분별을 가져왔다.

특히 선거 전후에 터진 ‘쯔위(周子瑜,16)사건’은 대만문제의 민감한 신경을 건드리는 사건이었다. JYP 소속의 9인조 여성 아이돌 그룹 트와이스(TWICE)의 막내 쯔위는 대만인이다. 매체에서 대만국기(엄격히 말해 중화민국 국기)를 흔드는 것이 빌미가 되어 중국에서의 모든 공연일정을 취소하였다. 이는 대만내부 젊은 유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음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차이잉원은 당선 후 한 시간에 걸친 국제기자회견에서 ‘쯔위’사건이 나를 깨우쳐 주었다고 밝혔다.

이번 선거는 천시, 지리, 인화가 모두 민진당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특히 차이잉원은 리등훼이 시기 ‘특수양국론’ 기초자 중의 한 사람이었고, 천수이볜 시기 대륙위원회 주임(장관급)으로서 ‘일변일국’을 밀고 나간 실무자다. 이번 차이잉원의 당선은 대만의 미래와 양안 관계, 중-미 관계 나아가 동아시아의 역학 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특히 중국의 역사적 과업인 대만통일문제는 북한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신현실주의 관점에서 볼 때 북중관계는 중미관계의 종속변수로 되어 중미관계가 협력적일 때 북중관계는 좋지 않았다. 대만문제 역시 이와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아무래도 대만해협의 파고가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강병환 박사 sonamoo3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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