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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회·망수 임금희 명인, 전통 다회 직기·직조기술 최초복원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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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회·망수 임금희 명인, 전통 다회 직기·직조기술 최초복원 성공
  • 박민정 기자
  • 승인 2015.04.09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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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공예대전 문화재청장상 수상
4월 29일 인사동 제자들과 발표회 개최 예정

▲ 다회·망수 명인 임금희. <사진제공=임금희 다회·망수연구소>
[KNS뉴스통신=박민정 기자] ‘다회’란 여러 겹으로 합사한 명주실로 짠 끈(끈목)을 가리키는 말로 옛날 복식에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우리의 전통문화다. 다회는 한올한올 손수 짜야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과정이 복잡하지만 그만큼 정교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예술’이다. 이 다회를 이용해 다양한 모양으로 짜낸 것을 ‘망수’라고 말한다.

‘다회’와 ‘망수’는 현재 대부분 사용되지 않지만 과거에는 ‘후수’ 등 궁중 의상에 사용되거나 선비들의 멋을 내는 도구이면서 양반 등의 계급을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되며 조선 복식에서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했었다. 다회는 복식, 장식용, 종교용, 의례용, 생활문화 전반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나, 전통 다회 기법과 다회 직기는 안타깝게도 맥을 이어오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었다.

▲ 요대치는 장면-구한말 화가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 중에서 (출처:프랑스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 국립문화재 연구소 p.124). <사진제공=임금희 다회·망수연구소>
이번에 전통 다회 직기 직조기술이 다회·망수 임금희 명인에 의해 최초로 복원되어 전통문화계에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로부터 끈목의 직조 기술이 발달되어 원삼국과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생활미화와 복식 문화 전반에 걸쳐 없어서는 안 될 주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원삼국시대에는 색사를 넣고 문양을 새겨 직조한 기술이 주변국인 일본에까지 전해져 1,2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정창원의 보고(寶庫)에는 조물명이 신라조, 고려조라고 명명하는 직조명칭을 접할 수가 있고, 이는 그 지역의 이름을 명명한 것이라는 학설과 주장을 찾을 수 있다.

▲ 상색 광다회(왼쪽)와 오색 광다회(오른쪽). <사진제공=임금희 다회·망수연구소>
그 섬세하고 오묘한 선조들의 전통 다회 직조기법과 직기는 산업혁명이라는 문화 이기에 떠밀려 사라지고 구한말 화가인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 중에서 그림으로나마 살아있을 뿐이다.

이 그림은 평직, 편직, 경무직을 직조할 수 있는 우리의 전통 직기임에도 불구하고 서구화된 직기에만 의존하여 문화의 뒤안길에 놓여 져 있는 실정이었다.

다회는 복식이나, 종교용, 의례용, 장식용, 생활문화 전반에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아얌, 휘항, 남바위처럼 복식의 쓰개용과 어가장엄용, 번의 장식, 불복장 유물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고 남성 복식에 두르는 광다회, 세조대, 동다회와 노리개, 장도끈 외에도 선추, 초상화 유소 등 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삶의 일부분이었던 전통 다회 기법과 다회 직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박물관에 남아 있는 다회는 주로 근현대 유물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는 현존만이 아니라 조상들이 쓰고 사용하던 모든 것들에서 오늘에 이어져 왔고 다회에 대한 무지(無知)는 후손들의 탓이라 하겠다.

▲ 전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다회·망수 명인 임금희. <사진제공=임금희 다회·망수연구소>
고대에서부터 근현대까지의 출토유물과 소장유물, 기록서 등을 통하여 접한 우리의 다회 모습은 공작미, 금은사를 비롯한 명주실, 초본류 등의 재료가 사용되었다는 기록과 궁중에서 사용되었던 것은 많은 궁중 기록서를 통하여 명칭이나 용도를 찾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재현을 해보고 싶어도 주로 목재료를 사용하는 직기의 특성상 현존하는 것은 여태껏 찾을 수가 없었다.

30년 전 임 명장은 김주현 스승을 만난 날부터 다회는 그의 삶의 전부였다. 당시 스승께서 우리나라에서 단절된 다회기법의 전반과 직기 복원에 뜻을 두고 역사를 거슬러 문화교류가 있었던 주변국의 다회 원류를 찾고자 애를 쓰시던 때였다. 수타의 기록과 직기로의 발전, 다회의 종류 등 중국, 일본, 인도 등의 직조법과 직기들을 연구하던 중 일본 직조기법 중에서 고려로, 신라조 라는 조물명을 찾을 수가 있었다. 이 조물명이 다회가 전해진 지역의 명명을 붙인 것이라는 주변국의 다회장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일본의 기록서인 삼대실록(三代實錄)과 연희식(延喜式)에 신라조, 고려조를 직조하기 위한 직기 명칭의 고려타, 신라타 라는 것도 찾을 수가 있었다.

물론 현재의 일본식 직기는 그 나라의 복식이나 장식물에 맞는 직기로 변화하였을 것이고 지금의 형태는 전통 우리의 다회직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연구에 열과 성을 다하시던 명장 김주현 스승께서 그동안의 연구 내용과 기술을 고려타틀로 짜는 다회 기능 전반을 전수하는 전수서를 임 명장에게 남겨주고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부터 외롭게 혼자서 가족 주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고려타 직기와 박물관에 남아 있는 유물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많은 차이점을 발견하게 됐다.

▲ 복원 직기로 직조 작업하는 임 명장. <사진제공=임금희 다회·망수연구소>
전승공예대전 문화재청장상 수상!

직기의 원류는 남아있지만 기능은 우리 선조들의 유물, 그대로 직조하기에는 확연한 차이점을 발견하고 직기의 기능을 꾸준히 연구한 결과 이십여년이 흘러 비로소 우리의 기능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직기를 복원하게 되었다. 그동안 공모전에 출품하여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로부터 입선, 장려상, 특선 등을 수상했다. 출품을 시작한지 10여년이 흘러 비로소 2011년에 대한민국의 대물림 장인들이 1년마다 경합하는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재청장상을 수상했다. 이에 복식학과 교수님들의 격려와 성원으로 2012년에는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어 많은 성원을 받았다.

일부에서 고려타기는 일본직기라고 말하며 고려조, 신라조는 일본에 현존하는 끈일 뿐,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일본의 이름난 다회장인의 주장에 의하면 1/1의 신라조라는 조물명은 신라에서 온 귀중한 유산임에 틀림없다고 자신의 논문을 통해 이미 발표 된 사실이다.

임 명장은 2003년 스승의 별세로 그동안 홀로 외롭게 연구에 몰두했다. 다회관련 책들을 독파했고, 그 결과 역사의 기록에는 아스카시대(592-707)부터 나라시대(710-784)에 일본식 다회용어인 구미히모라는 혁명이 일어났고, 한반도에서 색채와 문양이 화려한 다회와 제작기술이 전해졌다는 내용과 긴메이 일왕(6세기 중엽) 23년에 오오토모 사데히코가 고구려를 방문하여 구미히모와 구미히모 장인도 데리고 돌아왔다는 일본의 인용된 기록도 찾을 수 있었다.

임 명장은 나이 45세에 성균관대 대학원에서「조선시대 능조직 광다회의 복원적 연구-신라조, 고려조 기법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영예의 졸업을 했다. 그렇게 편직의 다회 연구를 계속하던 어느 날 기산 김준근의 요대치는 모양(출처: 프랑스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 국립문화재 연구소 p.124)의 그림을 발견하고서 너무나 반가움과 환희에 차 있었다.

▲ 대자끈 유물(조선후기). <사진제공=임금희 다회·망수연구소>
사선 엮음직 즉 신라조, 고려조라는 직조와 상하로 엮어져 상하교차조라는 직조기법 그리고 글씨를 앞뒤 배색으로 새기는 기법, 음각으로 새기는 기법 등 무수한 유물 복원과 재현에 열성을 올리던 터라, 기산의 풍속화에 나오는 ‘요대치는 모양’은 새로운 임 명장의 도전 목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날실을 교차로 들어 올리는 베 짜는 틀과는 달리 잉아가 없고 간단한 목타기만 그려져 있어서 많은 의구심을 품기도 하였다. 다시 그림의 표현을 살피며 직기의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하나씩 제작하여 전체를 맞춰 연구한 결과 기산의 그림은 정확한 표현을 했음을 알게 되어 비로소 직기 복원에 성공했다. 비로소 일본 직기로 작업한다고 주장하던 일부에서 벗어나 진정한 우리의 것을 찾았다는 벅찬 기쁨에 숨이 막히는 듯 했다.

이제는, 이 직기로 만들어진 유물이 있어야 연결이 될수 있다는 생각에 자료를 찾던 중 어느 학자께서 연구해보라고 준 자료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편직의 대자끈 이었고 여러 가지 색사가 들어간 유물이었다.

임 명장은 이렇게 기산의 요대치는 모양에 나오는 직기와 직조기술을 복원한 후 주변에서는 특허를 출원하라는 권유를 받게 됐다. 처음에는 기쁨이 앞서 아무런 생각 없이 변리사를 통해 자료를 정리하고 pdf file로 정리해 준비를 하였으나,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한 개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으로 남아야 하고 조상들의 지혜를 어떤 법체적인 것으로 매여 묶어 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비양심적이라는 생각에 접게 됐다.

▲ 임 명장이 제자들에게 시연하는 모습(왼쪽)과 실습지도 장면(오른쪽). <사진제공=임금희 다회·망수연구소>
4월 29일 인사동 제자들과 발표회 개최 예정

임 명장은 이제 한올 한올 실을 합사 연사하여 원통으로 정경하고 목타기로 하나하나씩 작업을 해서 오늘 4월 29일부터 인사동에서 제자들과 발표회를 가질 예정이다.

단절되어진 다회기능과 직기를 찾아내서 그 모양 그대로를 이어가야 한다는 정신으로 박병희, 유명현, 양창선, 이숙화, 구지현, 염성희 등 열성적이고 전통을 이어갈 사명감을 지닌 제자들이 있기에 임 명장은 더없이 마음 든든하다. 스승의 뜻을 이어 이제 임 명장이 스승이 되고 보니 감회가 새롭고 제자를 바라보시던 스승의 애틋함을 이제야 좀 알 것 같다고 한다.

인생을 함께라는 슬로건으로 사제는 뭉쳤다. 그리고 다회장인으로 걸어가는 이 길에 어떠한 비바람과 풍파가 몰아쳐도 꿋꿋이 이 길을 걸어가겠다는 임 명장의 결의에 찬 표정에서 비장함을 영력하게 엿 볼 수 있었다.
 

박민정 기자 kns@kn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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