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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위대한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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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위대한 협상”
  • 박세호 기자
  • 승인 2011.03.08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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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움직인 대협상 , 그 뒤의 감동스토리들

협상가들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성과를 이룬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포츠머스조약을 중재해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했고, 케네디와 흐루시초프는 핵 재앙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유럽, 아시아와 중동지역은 협상 결과에 따라 운명이 몇 번 바뀌었다. 이 책에서는 세계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8개 협정을 소개한다(저자 프레드리크 스탠턴은 미국 언론인이다. 김춘주 번역). 안보가 국가과제 1순위가 되고 경제력 확보를 위해 지구촌을 누벼야하는 첨단 무역국가인 대한민국은 가장 유능하고 애국심에 투철한 걸출한 ‘협상가’들을 많이 배출해야만 하는 절박한 요구에 직면하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 이스라엘 브엘세바의 주말 시장 <사진제공 ⓒ이스라엘관광성>

 

 

 

 

 

 

 

 

 

 

 

1) 이집트-이스라엘 휴전협정
중동에 불고 있는 민주화와 혁명의 바람은 우리의 시각과 고정관념을 깨어준다. 한치 앞을 못 보는 불확실성이 중동지역의 국제 정세를 장악하고 있다. 1948년 1차 중동전때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앙숙으로 국가 체면과 생존을 건 각축전을 벌였다. 이집트는 아랍권 맹주이며 엄청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정예소수 이스라엘에게 전선에서 밀리면서 체면을 구긴 상태였고, 이스라엘은 아랍 적대국들에 둘러싸여 신생국가 건설에 생존을 걸어야하는 절박한 사정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21세기 초에 그들은 중동평화의 양축을 받쳐주는 동반자관계가 되기도 하였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남에 따라 양국은 이제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계기를 맞고 있다.
번역서 “위대한 협상”은 당시 1차중동전과 관련한 정전협상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던져준다. 최근 사태로 인하여 본문의 8개 에피소드 중 ‘이집트 이스라엘 휴전협정’ 장면부터 먼저 손이 가고 읽어보게 된다. 그러나 나머지 7개 에피소드의 역사적 사실들도 스토리가 흥미진진하다. ‘세계사를 바꾼 여덟 개의 협정’이라는 문구 자체가 어색하지 않다.
이이휴전협정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주목을 끄는 인물은 양국 협상대표나 군부실력자들이 아니라, UN 협상중재관인 랠프 번치(미국인, 흑인)이다. 그는 ‘협상을 위하여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는’ 헌신적인 자세와 친화적인 인간관계 능력으로 인하여 분쟁 중 타협과 협상의 결과물들을 이끌어 낸다. 그렇다고 다른 인물들이 과소평가될 수는 없다. 이스라엘 팀의 이가엘 야딘과 이츠하크 라빈은 역사에 남을 인물들이다.

 
굴욕적인 결과에 항의하며 협상 팀을 뛰쳐나갔던 라빈은 후일 이스라엘 수상이 되어 1994년 아라파트 PLO의장과 오슬로 협정을 성사시킴으로써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으나 1995년 극우파 유대인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가엘 야딘은 국방장관으로 국가 위기에서 애국심을 발휘한 후 고고학자로 황량한 유대광야에서의 범국민적인 마사다 발굴 작업을 진두지휘했으며 사해사본 발견에도 이름을 남겼다. 이집트에서는 알팔루자 부대 부사단장이었던 나세르가 후일 이집트의 민족 지도자로 등장한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30년간의 위임 통치가 1948년에 끝나고 유태인 거주 지역과 아랍인 거주지역으로 분리하는 UN 안 협상이 실패하자,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포하고 이집트 주도의 인근 아랍국들을 공격했다.
UN은 스웨덴 출신의 베르나도테를 협상중재자로 파견했으나 예루살렘에서 암살되었다. 이스라엘은 집중공격을 개시해 이집트 전선을 파괴했다. 일주일도 안 되어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남부지역을 점령하고, 알팔루자 2,700명의 이집트 부대를 포위했고 북으로 진격해 갈릴리 지역도 점령했다. 수많은 정치 엘리트들이 무대 전면에 등장한다. 이스라엘과 중동의 대결은 2차, 3차 중동전에 이어서 늘 팔레스타인 분쟁의 핵심에 놓이게 된다.
UN안전보장이사회는 전투중지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휴전협상 개시를 촉구했으나 양국이 거부했다. 12월 10일, 이집트는 알팔루자의 정예부대 탈환을 위해 공격을 개시했으나 이스라엘군은 이를 격퇴하고 이집트 군을 시나이 반도 쪽으로 몰아냈다. 양국의 전투로 사망자와 피난민 대열이 줄을 이루면서 미국, 영국과 UN의 압력을 받고, 비로소 휴전협상에 동의한다. UN은 미국출신의 랠프 번치를 파견한다.
처음에 양국 협상 대표들은 공식회담 장소에서 의자에도 앉지도 않았다. 번치는 약 70일 동안 끈기와 인내로 양국 대표들을 스스럼없이 어울리게 만들었고 협정서에 서명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알팔루자의 병력은 안전하게 철수했고, 부사단장 나세르는 훗날 이집트 대통령이 되었다. 30년 후 캠프데이비드 협정 때까지 휴전 협정은 준수되었다. 30년간 중동의 평화를 가져왔던 랠프 번치는 1950년 처칠과 같은 거물을 물리치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미국 흑인으로서는 첫 노벨평화상 수상자였고 최연소 수상자이기도 했다.

▲ 이스라엘 브엘세바의 역사적 자취                         <  사진제공ⓒ이스라엘관광성 >

2) 쿠바 미사일 위기
1959년 쿠바에 카스트로 정권이 탄생하였다. 미국은 플로리다 해안 가까이 공산당 교두보가 마련되어 이를 붕괴시키려 했다. 소련서기장 흐루쇼프는 미국의 쿠바공격을 예상, 동맹국 보호를 위해 1962년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한다. 케네디 대통령의 해상봉쇄가 시작되고 미소 간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는다. 수백만의 희생자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따라 두 지도자는 전쟁을 피하려고 물밑 협상 및 공개 협상을 통한 극적타협으로 핵전쟁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다.                                                                                   

 가공할 만한 핵무기 위협 속에 살아가는 작금의 현실에서, 케네디의 특별보좌관 맥조지 번디의 말대로 “이러한 위험한 무기들을 하나라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3) 독립혁명 - 미국과 프랑스 동맹
미국은 1776년 7월 독립선언 시, 무기와 화약이 태반 부족했다. 13개 식민지 대표들의 대륙회의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 위해 벤저민 프랭클린을 대표로하는 사절단을 프랑스에 보냈다. 프랑스도 미 독립을 지원하고 영국의 식민지 미국을 영국에서 떼어냄으로써 양국 간의 원한을 갚고, 유럽에서의 세력 균형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승패를 예측할 수 없는 미영 간의 전투는 프랑스 결정을 미루게 했고, 프랭클린은 프랑스를 압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영국 대표와도 회동을 갖는다. 프랑스에 압박을 주는 외교 술책이었다. 결국 프랑스는 미국과 동맹을 맺는다. 프랑스의 지원은 전쟁의 방향을 바꾸었고, 최강국이었던 영국에 패배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 지원으로 연간 예산의 3배를 퍼부어 재정이 피폐되고, 왕실은 부득이 국민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것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발단이 되고, 1793년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참수되었다.

4) 루이지애나 매입
위 사건 이후 22년, 미국은 국제적 위기를 맞는다. 1803년 프랑스는 스페인 왕실과 접촉해 토스카나 공국과 교환해 루이지애나를 취득하였다. 나폴레옹은 여기에 신세계에서 프랑스의 중심지로 개발할 계획이었다. 미국 사절단의 먼로와 리빙스턴은 재정적자를 겪던 나폴레옹을 설득해 80만 평방마일의 루이지애나 영토를 6천만 프랑(1천5백만 달러)에 사들였다. 이 매입은 미국 지도를 바꿨고, 북미대륙의 모든 식민지를 집결시켰다. 미국 영토는 두 배확장 되고, 가장 큰 나라의 하나가 되었다. 나폴레옹에겐 프랑스가 재정적자이고, 토스카나 공국은 아직 통치 중이니 6천만 프랑은 거저 얻은 돈이나 같았다. 큰 수입을 얻은 나폴레옹은 1814년 전쟁을 도발했고, 동맹국들에 패해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다.

▲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사진제공: ⓒ비엔나시청>

5) 비엔나 회의
20년 동안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의 전쟁은 1814년 프랑스 패배로 끝났다. 4국 동맹(영국, 러시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은 영토문제를 위해 비엔나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는 승전국만 참석하는 회담이나, 이해관계 충돌로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도 테이블의 한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는 강대국들을 이간시키며 프랑스의 발언권을 강화하였고, 패전국임에도 나폴레옹 이전의 영토를 보존해 프랑스 이익을 지켰다. 오스트리아는 영토를 두 배로 늘렸고, 프로이센도 북유럽 지배세력으로 부상했다. 영국은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인접한 영토를 흡수한 네덜란드를 영향력 하에 두었다. 비엔나 회의는 스위스를 중립국으로 만드는 등 강대국 간 힘의 균형을 이루면며 유럽 판도를 바꿨으며, 군주제를 부활시켰다. 이후 유럽은 100년 간 전쟁없는 세월을 보내었다.

6) 포츠머스 조약
1905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과 러시아 대표를 포츠머스로 초청해 러·일전쟁 종식을 위해 중재를 한다. 러시아 대표 세르게이 위트의 협상력이 돋보였다. 일본 대표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대담성과 인간적 눈물에 일본대표 고무라가 백기를 들었다. 이 합의로 수십만 명의 인명을 구했고, 일본은 한국, 요동반도, 그리고 사할린 남부를 얻었으며, 만주철도 지분과 러시아 북태평양 연안 어업권도 획득했다. 일본은 많이 양보했지만, 강대국 위상을 굳혔고 아시아권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일본 주식은 폭락했고, 언론은 천황의 협정 무효화를 촉구하면서 폭동이 휩쓸었다. 1906년 일본내각이 총 사퇴했다. 러시아에선 차르의 지시를 무시하고 협상한 결과 양보안을 얻어낸 위트에게 백작 자격을 수여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평화를 위한 노력으로 미국인으로선 처음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미국은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내외에 과시하면서 세계 외교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7) 파리 평화회의
1919년 독일과 4개 연합국(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간 휴전은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켰다. 4천만 명의 전쟁 희생자들이 유럽을 피로 물들였으며, 생존자들은 평화협상에 기대를 걸었다. 전 세계 3/4을 대표하는 27개국 지도자들은 평화를 위한 국제질서 마련을 위해 파리로 몰려왔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의 국제연맹 창설을 위한 14개 원칙은 의미가 퇴색했다. 강대국간의 타협은 유럽 약소국들과 중동국들을 재편성했고, 독일 일부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패전국인 독일은 엄청난 빚더미에 올려앉았다. 독일은 영토의 13%와 인구의 10%인 7백만 명을 잃었으며, 탄광의 16%, 철 생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광산을 빼앗겼다. 독일의 식민지가 몰수되고 폴란드가 독립하면서 동 프로이센은 독일과 격리되었다. 독일은 분노하고 좌절했지만 살아남았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빼앗겼던 영토에 대한 미련과 갈망을 간직한 것을 간파하였고, 독일 주변에 살던 소수 독일인들을 세력 확장의 디딤돌로 활용하였다. 파리 평화회의 때 영국대표가 묵었던 마제스틱 호텔이 21년 후 독일 파리점령군사령부로 사용된 것은 흥미 있는 사실이다.

8) 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쿠바위기 후 24년, 미·소 핵 보유량은 20배 증가하였다. 강대국들은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 탄도탄 요격미사일(ABM) 제한, 핵탄두 장착용 탄도 미사일 제한 회담 등을 가졌으나 허사였다. 고르바초프의 제안으로 1986년 12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미·소정상회담에서 소련은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을 포함한 전략무기 감축을 제의하였다. 미국은 ABM 금지조약은 양보했지만 소련이 요청한 SDI 제한 요구는 거절했다. 이 노력은 냉전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슐츠장관과 세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합의내용을 보완해 문서화했다. 1987년 고르바초프는 SDI 제한 요구를 철회했고,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파기함에 동의했다. 레이건도 ABM 금지조약에 서명했으며,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은 4년 뒤 이뤄졌다. 협정 서명 5개월 후 크리스마스 날, 소련은 붕괴되고 12개 독립국가로 되었다.

<출판사 말글빛냄에서 펴냈고, 가격은 권당 15,000원이다.>

 

박세호 기자 bc4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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