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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의 진품명품] 신의 물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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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의 진품명품] 신의 물방울
  • 조성진 기자
  • 승인 2013.11.27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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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S뉴스통신=조성진 편집국장] 때론 고독도 하나의 입구다. 가끔 한없이 고요한 중에 홀로 있을 때 뜻밖의 관조가 열려지기도 한다. 자기 자신과의 사귐이 신비하게도 신비와의 사귐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은 때론 정화(淨化)의 장이다. 자기 영혼의 모양을 가다듬는 역할로서 말이다. 이러한 고독은 ‘품질’이 있어 정신을 고양시키고 사물을 보는 깊이를 더하게 한다.

독서나 여행도 품질 좋은 고독을 받아들일 수 있는 훌륭한 대상이지만, 그보다 더 단시간에 이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와인이다.

와인을 알기 전까지 나는,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그것도 여러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즐기며 같이 취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관조’보다는 ‘허무’에 가까운 하나의 단순하고 즉물적인 어울림에 불과하다. 동시다발적으로 수백에서 수천만병을 생산해, 오늘 마셔도 내일 마셔도 똑같은 맛인 일반적인 술에 비해, 와인은 연식(빈티지)과 생산지에 따라 그 맛이 천차만별이다.

천해의 기후 조건으로 포도재배가 그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해였다면 당연히 와인의 맛도 뛰어날 수밖에 없다. 반면 기후 이상으로 흉작을 맞아 품질이 낮은 포도가 재배되었다면 그 해에 생산된 와인 역시 맛이 떨어진다. 이래서 빈티지가 중요하다.

또한 포도 품종에 따라 카베르 쇼비뇽, 메를로, 말벡, 쉬라즈 등등 여러 이름으로 나뉘어 각 품종의 블렌딩을 통해 보다 새로운 맛을 생산해내기도 한다. 미셸 롤랑 등 세계적인 와인 전문가들이 최적의 맛을 위해 여러 품종을 섞는 시도를 해오고 있기도 하다.

무수히 많은 와인 중에서도 칠레, 미국, 이태리, 프랑스 와인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다. 프랑스를 제외한 칠레, 미국, 이태리 와인은 전문 식견이 없어도 다루기가 쉽고 낮은 가격대로도 맛의 풍미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 와인은 다르다. 코르크 마개를 개봉해 공기와 충분히 섞이도록 와인 잔을 돌려 가며 마시는데, 해당 와인의 최적의 맛을 느끼기까지에는 30분에서 1시간 또는 그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칠레를 비롯한 남미 와인이 누구에게도 낮을 가리지 않고 쉽게 그 맛을 주는 반면 프랑스 와인은 고집이 세다. 자기의 내면을 보여주길 꺼려해 많이 마셔보고 공부하는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만 자신을 드러내는 매우 자존심이 센 와인이다. 따라서 3~4만 원대의 프랑스 와인을 사서 마셔본 사람들은 같은 가격대의 칠레나 미국, 이태리 와인들에 비해 “맛이 별로”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마실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에 가장 민감한 와인이라 빈티지나 생산지, 등급 등 제반 고려를 하지 않으면 8~10만 원대 이상의 프랑스 와인을 마시더라도 그 맛을 전혀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 프랑스 와인의 맛을 깨닫게 되면 가장 다양한 향기와 맛의 세계에 빠질 수 있다.

프랑스의 샤또는 개인이 소유한 포도원에서 포도 재배부터 와인 주조까지 하는 것으로 생산자나 지역명, 포도농장 등의 이름을 붙여 판매한다. 샤또는 프랑스 내에 수천 개도 넘는다. 와인 중에서도 품질이 가장 좋은 것에만 샤또를 붙일 수 있기 때문에 샤또는 단순히 프랑스의 와인이라는 것을 떠나 세계 최고의 와인으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품질에 따라 프리미엄 그랑퀴르, 그랑퀴르, 크루 브루조아 등등 다양하게 등급을 매기는데, 특히 빈티지 즉 숙성도에 따라 가격대가 갈린다. 가장 대표적인 보르도 와인의 경우 토양, 기후, 지형 등 포도 생산 최적의 지방에서 생산되는 것인 만큼 와인의 황제다. 연간 생산량도 7억병으로 어마어마한데 이중 80% 이상이 레드와인이다. 흔히 말하는 바디감도 만족시키므로 와인애호가들이 세계의 다양한 와인을 마셔보다가 결국은 가격대가 높더라도 그랑퀴르급 보르도로 기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깊고 우아하며 화려한 풍미의 프랑스 와인에 비해 이태리 와인은 산뜻하고 상큼하다. 물론 전통의 명품 중의 하나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를 비롯한 몇몇 와인의 경우 깊이와 무게감이 상당해 보르도와는 또 다른 와인의 진수를 전해준다.
캘리포니아의 나파벨리로 유명한 미국 와인은 일반인도 쉽게 그 맛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맛있는 와인’을 찾는 사람에겐 최상의 선택이다. 몇몇 유명 와인대회에서 프랑스 와인을 누를 만큼 미국의 와인은 현재 새로운 챔피언의 위치에 있다.

해당 연도에 극히 제한된 수량만 생산하기 때문에 와인은 의미 있는 시간에 의미 있는 사람과 마셔야 한다는 말이 있다. 더욱이 개봉후 처음 마실 때와 두 잔 세 잔 마실 때의 맛이 꾸준히 변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술과 다르다. 마치 생명이 있는 유기체처럼 공기와 섞이는 와중에 그 맛이 계속 업그레이드되는 것이다. 와인을 술이 아닌 ‘살아있는 자연’에 비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와인에는 세계의 문화와 자연,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깐깐하고 고집 세 쉽게 그 맛이 열리지 않는 프랑스 와인은 곧 프랑스의 민족성과 문화대국으로서의 강한 프라이드와도 연관이 있고, 깊이와 무게감에 맛도 좋아 어디서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칠레 와인은 남미의 낙천적이며 터프한 기질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 병의 와인으로 이 모든 것을 음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와인은 혼자 ‘품질’좋은 고독을 즐기며 세계의 역사와 문화, 자연을 동시에 여행할 수 있는 1석 5조의 ‘신이 내린 물방울’인 셈이다.

피에르 쌍소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에서 “만일 인간과 장소와 계절이 섬세하고 은밀하고 감동적으로 조화를 이루었을 때 시정이 태어나는 것이라면, 와인을 마시는 그 자체가 시적인 행위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썼듯이.

조성진 기자 corvette-z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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