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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300만 인천속의 원도심 동구…가장 ‘동구’스러운 것이 가장 큰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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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300만 인천속의 원도심 동구…가장 ‘동구’스러운 것이 가장 큰 경쟁력이다
  • 최도범 기자
  • 승인 2013.09.05 1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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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인천은 300만에 이르는 전국 3대 도시로 급부상하며 영종국제공항과 송도국제도시, 청라도시, 검암 신도시 등 다양한 개발의 아이콘으로 유명하며 대중국 무역의 일선에 선 대표적 항구 도시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 가운데 중구와 동구는 개항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인천의 문화와 역사의 중심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중구는 개항 당시 국제적인 도시로 불렸다면 동구는 인천 서민의 애환과 서민 경제의 중심에 있었다.

오늘은 동구가 갖고 있는 역사의 흔적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기 일보직전의 문화유산을 워킹둘레 코스로 돌아보며 개발과 역사의 공존 가능성을 점검하고 동구만의 가치를 새겨본다.

동구는 도원역과 동인천역인 인천 1호선을 통해 남과 북으로 중구와 동구가 나뉘어 있으며 이 철도는 경인선에 잇대어 과거 인천 개항의 중심과 근대화 사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해 왔고 이어 경인 전철의 개통으로 서울과 동시간대에 움직이는 산업 인력 운송의 기능을 맡아 지금까지 이어왔다.

워킹둘레 코스로 도원역에 내려 우측으로 빠져 나와 철도 위를 넘으면 우각로를 만나는데 우각로는 과거 개화기에 외국인과 상인들이 서울을 가고자 하며 소나 말의 수레를 통해 상경하는 길로 우각로 좌측으로 내려오며 동구의 워킹둘레 코스가 시작한다.

▲ 도원역 우각로에 위치한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 전경./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이 길에서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을 만나는데 이 복지관 건물은 19세기 말 미국 감리교회가 파견한 여자 선교사들의 합숙소로 사용했던 곳으로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근세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복지관은 양철(함석)지붕으로 구조가 독특하며 벽체는 빨간 벽돌로 쌓았으며 내부는 목조로 구성. 창호는 조선시대 서원이나 절의 승방 등에서 사용하던 방법을 빌어 쓸용(用)자 모양으로 꾸몄고 가장자리는 빗살 모양으로 짜 넣은 특징을 갖고 있으며 지난 1993년 시도유형문화재 18호로 지정됐다.

▲ 선교와 신식교육을 위해 1892년 미국선교사 존스가 세운 영화초등학교 전경./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도로를 따라 이어진 곳에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영화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 학교는 1892년 미국 선교사 존스에 의해 세워진 학당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학교로 1911년 9월 완공된 동구의 보고이다.

영화 초등학교와 함께 바로 옆에는 1907년 세워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16호의 창영초등학교가 함께 있다. 이 학교는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로 유명하며 1919년 3 ·1만세운동 당시 인천의 만세운동의 산실로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본관동과 (구)교사동으로 나뉘어 있다.

창영 옛학교 교사는 1924년 지어진 것으로 일자형 교사에 화강석으로 아취형의 벽체 윗부분을 거성한 것과 근세풍의 현관 장식, 지붕에 채광 창문을 만든 구성은 학교를 대표하는 미적 구성요소이며 일제 강점기 건물로 동구를 상징한다.

특히 이 학교가 위치한 금창동은 학교 앞 도로를 중심으로 과거 근대사에 중심 이었으나 지금은 원도심 가운데 슬럼화의 대표적 동네로 근대의 자료 가치로 보전해야 한다는 주장과 신도시로의 개발을 요구하는 원주민간의 의견 충돌로 민심이 양분 된 현상을 보이고 있다.

▲ 우각로 끝에는 만화에 나올만한 깡통 로봇이 책방골목을 지키고 있다./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학교를 지나 내려오면 과거 근대화시기에 배가 들어와 접안하던 특성으로 인해 불리는 배다리가 위치해 있으며 이 방향으로 내려오면 한국전쟁 직후 폐허의 거리에서 리어카로 시작한 책방골목이 위치해 있다.

이 거리는 해방 전 서양에서 급격하게 들어온 서양문물의 책들로 풍부한 자원이 넘쳐나며 전국에서 전쟁이후 이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1960년 30~40곳의 책방으로 전성기를 누린 것으로 지금은 쇄락의 길을 걸어 약 8곳의 헌책방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토지라는 대하소설로 유명한 故 박경리 작가가 신혼초 남편을 따라 인천에 자리를 잡고 22세 때인 1948년부터 2년간 이곳 책방 골목에서 서점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책방골목에 대한 문화적 검증이 대두되고 박경리 북카페를 만들겠다는 지자체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 이곳이 토지소설의 작가 박경리님이 신혼초에 2년간 거주했다는 금창동 책방골목으로 지금은 8개 정도의 책방이 명목을 이어가고 있다./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 금창동 책방의 책들이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특히 이 골목은 박경리 작가가 당시 인천에 올라와 책 속에 묻혀 살던 곳으로 이 골목에 대해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라고 그의 유고 시집 약력에 기록하며 “이 때가 책에 흠뻑 젖을 수 있었던 생에 가장 황홀한 시기였다”고 밝힌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주변에는 이 골목을 특화의 거리로 보전하고자 여러 시민 단체들이 찾아와 꽃길을 가꾸고 낡은 집을 자비로 보수하며 벽화를 그리는 등 인력 기부를 통해 거리 살리기에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우각로 끝자리 책방 골목을 나와 배다리 지하상가로 길을 지나자면 지하상가의 ‘배다리 전통공예의 거리’(지하상가)를 만난다. 이곳은 1996년부터 공예인들이 모여들며 조성된 공예의 거리로 총 50여 개의 점포들이 제 각각 자신들의 공예품을 전시하고 수강생을 양성하고 있어 서울의 작은 인사동 거리를 기억케 한다.

▲ 배다리 지하상가에 있는 전통공예의 거리 전경./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 배다리전통공예의 거리에 있는 공예상가의 전시품들./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히 이 거리는 인천 지역의 전통 공예와 현대 공예의 정실을 보여줌과 동시에 각기 매장 마다의 특색이 있어 같은 종류의 공예품을 찾아보기 힘들며 살아있는 전통공예의 작업 현장을 체험할 수 있어 외국 관광객이 찾는 코스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지자체의 체계적인 지원책이 없어 아직 활성화 되지 않은 모습이 안타까움을 낳는다.

▲ 동인천역 북광장에 위치. 중앙시장과 그릇시장, 양키시장이 줄이어 있는 배다리 전통 거리./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 배다리의 옛 풍경.(사진=동구청)
이 거리를 나오는 입구에는 인천 전통의 재래시장으로 아직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그릇도매 시장과 한복의 거리 그리고 양키시장이 나란히 붙어 있어 ‘배다리 전통의 거리’로 불리고 있다. 이 거리는 인천의 시청이 중구에 소재하고 있을 1980년 중반에 만도 인근 지역에서 가장 활성화됐으며 인천 국철의 동인천역과 맞붙어 있어 유동인구가 가장 많았던 곳이다.

또한 양키시장은 인천 부평에 소재했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미군 생필품과 각종 장비들이 넘쳐나 1970년대 학생들에게 유행했던 군복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담배, 술, 커피, 초콜릿 등 각종 미제 먹거리로 유명세를 누렸다.

특히 이곳의 한복 시장은 지금도 50여 곳이 아직도 성행하며 고전 한복과 개량한복 그리고 원단 시장이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인천의 한복과 양장의 원단공급 책을 맡고 있다. 또한 인근의 소품 가계들과의 어울림으로 인해 인천의 한복과 양장계에 다양한 패턴의 디자인을 공급하는 등 그 기능이 아직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이 거리는 도시재생사업에 포함돼 있어 조만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예정이어서 아쉬움을 앉고 있다. 이 자리에는 대형 쇼핑몰과 같은 현대식 건축물이 예정돼 지금의 추억의 공간으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수도국산을 오르면 만난 골목길에 무당벌레를 이용한 무당벌레정거장이 정겨움을 더한다./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 수도국산 주변에 밀집한 주택가 골목길 허공에 늙은 수세미가 전깃줄에 몸을 싣고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이곳 시장을 뒤로하고 도로 건너편에는 수도국산 정상에는 달동네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을 오르는 과정에 송현동 달 동내를 지나게 된다. 이 동네는 개항 이후 중구의 전동에 모여 사는 일본인들이 들어와 집단 거주가 시작되며 자연스럽게 밀려난 서민 3,000여 가구가 이룬 마을이다.

이 동네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선 곳으로 뒤쪽에는 매립 전까지 해안가가 있었으며 매립으로 인해 공장이 들어서고 판자촌이 생겨나 60년대의 빈민촌락이 구성됐었다. 이후 새마을 운동으로 일부 송현동에는 근대식 주택이 들어섰으나 아직도 달동네의 색체를 안은 채 골목 문화가 자립잡고 있다.

▲ 달동네박물관의 전경./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10여분 오른 수도국산 정상에는 2005년 10월경 완공된 수도국산달동네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박물관에는 이 동네의 달동네 역사와 함께 60년대 우리들의 자화상을 전시하고 당시 생활의 모형을 만들어 실제 이곳 달동네의 골목을 재현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개관한 이래 지속적으로 관람객이 방문해 월 평균 1만 명이 다녀가는 등 지역 박물관으로 성공한 케이스며 박물관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의 도시정리로 인해 동구의 전체 도시를 한눈에 바라보는 명당자리로 정평이 나있다.

▲ 수도국산박물관에는 60년대의 동구의 골목들이 재현되고 소품들이 지난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 얼마전까지 솜틀방에서 돌아가던 솜틀기계가 이제는 기억의 회상을 위해 박물관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 박물관에는 옛날 상점이 자리하며 60년대의 라면들과 사탕을 근으로 달아 팔던 모습이 생생하다./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 배다리
특히 정상 인근에는 아직도 소나무 군락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박물관과 함께 인천송현근린공원이 조성, 주민들의 아침 운동 장소 활용과 방문객들이 더위에 지친 피로를 시원한 바람과 함께 작게 조성된 분수로 위로하고 있다.

이곳으로 올라온 골목길 옆 솔빛 아파트 정문 길로 내려오면 이 지역의 대표적인 재래시장 송현시장을 만난다. 이 시장은 길 건너 중앙시장과 양키시장과 함께 지역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으로 지난 2011년 리모델링을 마쳐 현대화 시설을 갖춰 문화관광형 시장이다.

이어 송현시장 입구를 지나 우측 약 300m 거리에는 고종 16년(1879)에 축조 완공된 화도진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공원과 함께 20,667 평방미터 규모로 조성돼 관광객의 볼거리와 쉼터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 호도진에 안사람들의 생활터전인 내사의 전경./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 한미수호조약을 조인한 화도진의 동헌 전경./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이곳 화도진은 고종 19년 전권대신 신헌과 미국의 전권대사 슈벨트 제독 사이에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후 갑오개혁(1894)으로 인해 군제가 개편됨에 따라 소실됐다. 그러나 1982년 5월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인천시에서 원형을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도진은 크게 동헌과 내사, 사랑채로 나뉘어 있고 동헌은 집무실이며 내사는 안주인의 거처,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거쳐하는 곳이다. 또한 동헌 옆에는 전시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신헌과 슈벨트 한미수호통상조약의 주인공들의 흉상과 당시 무기들이 전시되고 있다.

▲ 화도진 전시관에 전시된 한미수호조약의 전권대신 신헌과 미국의 전권대사 슈벨트 제독의 흉상이 전시돼 있다 ./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특히 조약을 체결한 동헌에는 뒷마당에 대나무 숲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쉼터의 공간으로 육모정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당시 관리들의 휴식 공간과 책을 읽는 장소로써 내사(안채)와 연결된 작게 만든 문이 당시 남과 여의 엄격한 신분 차이를 느끼게 한다.

화도진을 나와 동인천 방향으로는 작은 삼거리 코너 건물에 ‘운석(雲石)의 터’를 만나는데 이는 전 국무총리였던 장면박사의 유년기 시절을 보낸 가옥의 터로 지금은 표석만 있을 뿐 상가 건축물이 들어서 있다.

▲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부통령을 지낸 장면박사가 인천에서 태어나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낸 터로 지금은 새로 들어선 상가 입구에 흔적만을 남기고 있어 안타깝다./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장면 박사는 함경남도에서 부모님들이 인천으로 이사와 태어나고 자라며 유년기와 학창시절을 보내고 수원고등농림학교로 옮겨가기까지 인천 화평동에서 보냈다. 그는 공부와 천주교 순종의 아들로 지역에서 이름난 학생으로 유명했으며 교사로써 정치인으로써 인천의 큰 인물임에는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곳은 소설가 박경리님이 2년간 머문 자리를 북카페로 만들자는 지자체의 노력과는 달리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를 지내고 1956년 부통령을 지낸 장면 박사에 대해 아직도 인천 지자체에서 연구와 검증 등 별도의 관리가 없다는 점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비록 일제 강점기에 장면 박사가 자신의 종교인 카톨릭 신앙인 대표로 일제가 추진한 회의에 참석, 이로 인해 일부에선 카톨릭 친일파로 분류하고 있지만 이는 故 김수환 추기경이 이에 대해 ‘종교인의 대표로 참석한 자리일 뿐 장면박사의 사상과는 다르다’는 주장과 1998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된 공로로 볼 때 장면 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해본다.

장면박사의 생가를 돌아 철도 방향으로 내려오면 이곳에는 세숫대야 냉면으로 유명한 ‘화수동 냉면 골목’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과거나 지금이나 한 여름과 겨울에도 서울과 경기도 인근에서 냉면을 먹기 위해 몰려드는 인파로 휴일에도 자리가 모자란다.

▲ 인천 화평동에 위치한 냉면골목./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이 거리는 1883년 개항시기에 더위에 지친 상인들과 노동자들에게 시원함을 배달하던 곳으로 싼 가격과 냉면 그릇의 크기와 양, 그리고 수많은 냉면 가게들로 인해 이곳을 찾는 이의 입을 벌어지게 한다고 한다. 또한 화평냉면의 맛은 평양과 함흥냉면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특히 화평냉면은 면에 대해 손님이 원할 경우 가격과 상관없이 면의 리필은 무한대 제공해 냉면의 양을 걱정 할 필요가 없다. 또한 가계마다 특성에 맞춰 과일과 회를 얹어 주는 등 열무와 함께하는 화평냉면은 지역의 이름을 달기에 부끄러움이 없다.

만일 냉면을 먹기에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면 냉면 골목을 지나 3분 거리에는 동인천역 북 광장 송현 순대골목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전국에서 맛으로 소문났으며 찹쌀순대와 곱창전골은 인천 시민들이 즐겨 찾는 메뉴이기도 하다.

▲ 동인천역 북광장에 위치한 송현순대골목 간판들이 손님의 입맛을 간지른다./KNS뉴스통신=최도범 기자
이곳 동인천의 순대는 원래 수문통에서 시작해 골목을 이뤘으나 수문통에 복개공사가 이뤄지며 지금의 송현순대골목으로 자리를 이전, 1990년대 인근의 공장에서 일하던 근로자들의 야식으로 사랑받으며 지금까지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순대 골목과 함께 이번 동구의 워킹코스 종착지인 동인천역 북광장은 지하상가를 통해 중구이자 동인천역 남광장과 연결돼 상권이 이어지고 있으며 과거 원도심으로 구분되기 전에는 이곳이 청춘의 거리이자 우리 어르신들의 삶의 근원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원도심의 슬럼화와 공동화 현상으로 인해 개발의 요구가 늘어나는 요즘, 과거의 흔적을 무조건 지우기보다는 구도심의 추억을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려 원도심의 색조를 입힌 가장 ‘동구’스러운 조화의 개발이 필요해 보인다.
 

최도범 기자 h21y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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