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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혼을 승화시킨 옻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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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혼을 승화시킨 옻칠 화가
  • 김학형 기자
  • 승인 2013.05.08 22: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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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정상엽 옻칠작가 / ‘여비진 옻칠아트’ 대표

예로부터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나무나 금속의 부식을 막고 모양을 내기 위해 옻나무에서 채취한 진액을 발라왔다. 옻나무 진은 생산량이 적고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도료로 여겨졌으며, 이처럼 옻칠을 한 기물이나 용기를 칠기(漆器)라고 한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나전칠기는 여러 칠기 종류 가운데 하나로, 자개(조개껍질 등)를 쪼개 붙이는 나전(螺鈿)이 들어간 공예품을 말한다. 다시 말해 나전칠기를 비롯한 칠기의 핵심은 옻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편집자 주>

▲ 정상엽 작가. <사진=김학형 기자>
[KNS뉴스통신=김학형 기자] 정상엽 작가는 옻칠화를 그리는 화가이자, 대학에서 옻칠을 가르치는 강사다. 배재대 칠예과에 입학하면서 옻칠에 입문했고, 중국 칭화대 미술학원 공예미술과에서 칠화전공 석사과정을 마치며 본격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중국 하남공업대학 디자인예술대학에서 2년간 외국인 교수로 중국 학생들을 가르쳤고,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모교인 배재대에서 옻칠화 강의를 맡았다.

개인전은 물론 꾸준히 그룹전과 국제교류전에 참가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80점 가량의 작품을 발표했다. 지난 4월 인사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는 정상엽 옻칠화전’은 4번째 개인전이다.

1인 다역, “노력하기 때문”…“멀리 가기 위해 함께 간다”

이미 충분히 바쁠 것 같은 그는 최근 직함 하나를 더했다. 옻칠 작품이 접목된 아트 상품 브랜드 ‘여비진 옻칠아트’의 대표. 옻칠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다 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옻칠이 대중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의례적으로 ‘그저 노력할 뿐’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그 만큼 옻칠의 대중화가 그의 간절한 희망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다는 표현 이리라.

여비진(與裨進). ‘더불어 도와 나가자’는 의미다. 함께 가자는 그의 제안이자 다른 작가들과의 협업을 염두에 둔 이름라고 한다. “옻칠 역시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개인 역량이 중요하지만, 아무리 혼자 뛰어난들 옻칠의 범주와 인식, 나아가 시장을 넓히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며 그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주변에 좋은 작가들이 많기 때문에 함께하는 기쁨은 물론 상품의 다양성도 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는 그의 “옻칠이 갖는 예술성을 우리들 일상생활 가까이로 끌어오고 싶다”는 바람대로 “만지고 느끼고 사용까지 할 수 있는 감각적인 아트상품”을 개발·제작하고 있다.

그저 좋은 그림 너머, '관계맺음'이란 의미의 재발견

▲ 연결고리, 나무판위에 옻칠, 120x120cm, 2011.
사실 정상엽 작가의 작품은 옻칠 기법을 빼고 보면 회화에 가깝다. 작품의 동기(motive)를 주로 자연에서 얻는다는 그의 말대로 그림에는 나무, 바람, 구름 등이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은? 따로 없다. 마치 우리 모두가 각자 인생의 주연임을 깨달은 이에게 중요한 것은 삶을 채워나갈 그 무엇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가 그리는 자연은 여느 작품들 속에서 등장하는 위대함이나 불멸성 따위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들 삶과 함께하는 터전으로써의 모습이다.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풍경과 일상 속에 감춰진 감정적 정서들이 그의 추상적 풍경화로 소환된다.

일반 회화로 여기까지라면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특별할 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상엽의 옻칠화는 충분히 특별했다. 그의 세계관이 화폭이 아닌 나무판 위에 옻칠로 표현되면서 또 다른 세계와 의미를 만들어낸다. 마치 어린왕자가 지구에서 만난 여우에게서 얻은 깨달음과 같은.

여우는‘길들여진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뜻으로, 그리하면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서로에게 유일한 의미가 된다고 말해준다. 나무가 살아온 시간은 향기가 되고, 옻칠이 따스한 기운은 빛깔이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진 모습이 옻칠화이다. 이들이 만남이 다른 어떤 작품도 가질 수 없는 오묘함과 영롱함으로 지닌 옻칠화로 다시 태어남을 느꼈다. 여기에 정상화 작품세계를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일상의 풍경과 감정들이 만나면, 보는 이로 하여금 수많은 미술작품들 가운데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품을 만났다는 착각과도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바로 이것이 옻칠의 매력이자 정상엽의 힘이다.

“같은 곳,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저마다의 생각이 다를 것이며, 같은 사람조차 언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작품을 통해 어떠한 결론이나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기분과 감정이 반영된 그림 속 소재 하나하나가 관객에게 손 내밀어 각자의 세계에 말을 걸기 바란다. 소통하기를 원한다. 다음은 관객의 몫이다”

까다로운 물성과 방대한 재료, 그래서 더 특별한

▲ 원초적인 터전 2, 나무판위에 옻칠, 지름 30.5cm
한편, 옻칠화가 공예와 회화가 합쳐진 그러나 독립적인 분야가 돼야 한다는 게 정상엽의 생각이다. “단지 그리거나 혹은 만드는 게 아니라 붙이고, 자르고, 사포질 하고, 칠하는 것 등의 과정이 복합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재료만 봐도 잘 알려진 자개, 달걀·메추리알·오리알 껍질부터 두부, 철사 등 생각지 못한 것까지 방대하기 이를 데 없다. 문득 궁금했다. 재료들이 뜻대로 다뤄지지 않으면 열받기도 하는지. 그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말 한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옻칠의 물성(物性)이 여느 도료들과 달리 많이 까다로운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다 전통공예 기법에서 사용되는 재료들의 이해, 그리고 새로운 재료를 찾고 연구하는 등의 일련의 과정은 상당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스트레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감당할 정도의 시련이자 기다림과 극복을 배우게 한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옻칠은 내게 많은 것을 깨우쳐줬다.” 이어 그는“어떤 과정도 소홀히 할 수 없고 한 번에 몰아서 할 수도 없는 것은 옻칠만의 특성이 아니라 다른 장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한 작품이 탄생되기까지 고된 과정을 겪는 것은 모두 같다”는 생각을 전했다. 이 말은 “그러므로 더욱 옻칠화가 하나의 분야로 인정되길 바란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 정상엽 작가.

또한 그는 작업이 잘 안되고 막힐 때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새로운 곳도 좋고 익숙한 곳도 좋고, 그저 작업실을 떠나 다른 공간을 느낀다. 여행에서의 나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려 노력한다. 긴장하지 않고 최대한 느슨하게 다니는 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작업으로 풀어내고 싶은 것들을 눈으로 사진으로 담는다"면서 "한걸음 나아가는 작가로서 나에게 맞는 색깔을 하나씩 찾아가기 위한 내공을 쌓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그는 ‘여비진 옻칠아트’의 운영을 통해 옻칠의 몸피를 아름답게 넓히고 싶단다. 또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좀 더 많은 활동을 통해 옻칠 예술을 알리고 보여 줄 계획이다. 

전시회에서의 만남 뒤 돌아오는 길에 그가 건네준 도록(圖籙)을 열어봤다. 도록은 일반적인 책자 외에도, 8개의 연작으로 만들어진 그의‘바람따라 구름따라’작품을 손바닥 크기의 두꺼운 보드지 8장에 똑같이 인쇄한 별개의 도록이 있었다. 마치 좋은 미술 작품 한 꾸러미를 선물 받은 것 마냥 기분이 좋아졌다. 실제 작품에서 받았던 “과연 천년을 이어갈 빛이라 할 만하다”는 느낌과는 다르게 이번엔 “소유하고 싶은 무한 충동을 일으키는”선물과도 같았다. 이는 옻칠도 나무도 그림도 아닌, 전적으로 작가의 매력이자 세심한 배려 덕이 아닐까.

▲ 바람따라 구름따라, 나무판위에 옻칠, 200X30cm.

 

김학형 기자 khh@kn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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